”예술인은 척결대상 아니다”
”예술인은 척결대상 아니다”
  • 정준규 기자
  • 승인 2017.02.24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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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의원, 문화계블랙리스트에 대한 소회 밝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남용하고, 측근에게 넘겨”
국회 의원사무실에서 만난 도종환 의원 /사진 정준규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도종환 詩 '담쟁이' 中에서 

요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詩) 중 하나가 ‘담쟁이’다. 시련을 딛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를 떠올리며 많은 이들이 낭독을 통해 희망을 찾는다. 침체된 최근 한국 사회분위기도 시의 인기에 일조했다. 시 속 담쟁이 삶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까. 이 시의 저자는 잘 알려진 대로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청주 흥덕)이다. 그가 쓴 ‘담쟁이’만큼이나 최근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최순실 게이트와 더불어 온 나라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소문으로 떠돌던 블랙리스트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이가 바로 도 의원이다. 2년여의 추적과 탐문 끝에 이룬 집념의 결과였다. 도 의원을 만나기 위해 국회 의원사무실을 찾았다. 인사를 건네는 환한 웃음과 온화한 말투는 여전했다. 하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예술계 인사들의 제보를 통해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실체에 관심을 갖게 된 도종환 의원 / 사진 정준규

Q.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라 불리는 명단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지시로 2014년 6월 경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 반대하고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다 판단한 예술인들이 대상이었다. 작성 목적은 예산지원 차단이었다. 블랙리스트 작성 시기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많은 국민들이 “국민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던 시기였다. 그 분노와 슬픔에 대한 대응책으로 청와대는 블랙리스트를 만들도록 주문했고 광범위한 재정적,사회적 제제를 단행한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명단 수집과 작성은 당시 정무수석실 신동철 비서관과 정관주 비서관이 맡은 것으로 특검조사에서 드러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블랙리스트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로 하달됐고 문체부는 이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출판문화산업진흥원,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산하기관으로 보내 정책에 반영토록 했다.

 

Q. ‘문화계 블랙리스트’ 존재에 대해 처음 의혹을 갖게 된 건 언제인가?

지난 2015년 모 문학작품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인물로부터 미심쩍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내용은 이랬다. 문학작품에 대한 심사를 마치고 났더니 문화예술위원회 직원들이 그중 14명을 제외시켜달라고 했다. “작품성을 따져 내린 결과니 뺄 수 없다” 하자 그럼 그 중 7명만 빼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이유도 모른 채 선정자들을 제외시킬 수 없다”고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거부했지만 훗날 더 많은 대상자가 탈락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연극계에서도 같은 제보를 들을 수 있었다. 심사가 모두 끝났는데 문화예술위원회 측에서 심사위원회 재소집을 요청했다. 선정된 예술인 중 연출가 한 사람을 빼야한다는 게 이유였다. “심사평까지 끝낸 상황에서 번복이 어렵다”고 하자 해당 연출가를 찾아가 포기를 종용하기까지 했다. 수개월 시달림 끝에 결국 연출가는 스스로 선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유사한 정황들이 문화계 곳곳에서 포착됐다. 특정 예술인을 가려내려는 검은 의도가 분명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추적하게 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추적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도 의원/사진 정준규

Q.제보에 의존해 블랙리스트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확신을 갖게 된 시점은?

블랙리스트 존재에 확신을 갖게 된 건 지난해 국정감사 때였다. 국감자료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로부터 회의록을 전달 받았는데 회의록 원본을 갖고 있던 사람을 만나 확인해 보니 14페이지 가량이 빠져 있었다. 삭제된 분량은 블랙리스트 관련 회의내용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예술위 위원장에게 “책임심의위원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왜 반영이 안됐냐” 물었더니 “해당기관에서 그 사람을 심의해 ‘된다,안된다’를 결정해 통보하기 때문에 우리도 참 곤란하다”는 대화내용도 있었다. 뭔가를 숨기려한다는 심증이 굳어지면서 블랙리스트 존재에 대한 확신도 커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문체부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출판문화사업진흥원이 주관한 사업을 살펴보다 석연치 않은 점들을 발견하게 됐다. 예를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우수문예지지원 지원사업의 경우 50여건이던 지원대상이 14건으로 대폭 축소됐다. 예산으로 책정된 10억 원도 3억 원밖에 쓰지 않고 나머지는 다른 사업으로 전용했다. 결국 지난해 초 우수문예지 지원사업은 완전 폐지되고 말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것 역시 문체부에서 예술위로 하달된 블랙리스트가 깊이 관여돼 있었다. 블랙리스트 문인들이 참여한 문예지를 배제하려다 보니 주어진 예산을 제대로 운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업방식을 변경해가며 운영을 시도했지만 이마저 뜻대로 안되자 결국 폐지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전용극장 지원사업’에서는 갑자기 심사기준이 바뀌는 일도 벌어졌다. 대학로 극단들을 지원하던 사업은 대거 중단되거나 축소됐다. 터무니없이 봉변을 당한 피해자들은 모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예술단체나 예술가들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서 운영에 큰 타격을 입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국내 영화제 심사에서 내로라하는 영화제들을 제치고 최고점을 받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행사를 도와야할 정부가 집행위원장 문제까지 들먹여가며 행사진행에 차질을 빚었다. 급기야는 예산마저 반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유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된 한 편의 영화때문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이빙 벨’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면서 정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청문회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는 도종환 의원/ 사진 정준규

Q. 블랙리스트 명단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입수했는가?

입수경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단 9473명 명단을 만든 이는 문체부 내 담당사무관이었다. 사무관에게 명단을 만들라고 지시한 이는 청와대 교문수석실 행정관이었는데 그 역시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선별기준은 대체로 명확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시국선언에 동참한 이들, 세월호 참사 시행령 개정과 관련해 서명에 참여했던 이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나 박원순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 이런 범주에 해당되는 예술가들을 가려내 9473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Q.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은 청문회 기간 내내 블랙리스트 존재를 부인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블랙리스트 관련 자료를 모두 파기하라는 조 장관 지시를 받고 담당공무원들이 자료를 모두 파기했다. 그런데 파일을 파기하면서 문서를 한 부 남겨 보관하고 있던 공무원이 있었다. 조 장관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조 장관이 블랙리스트 존재를 부인한 것도 증거가 모두 파기됐다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모르쇠로 조 장관이 일관하는 동안 문체부 담당공무원들을 찾아가 블랙리스트 자료를 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관련자료를 모두 폐기했다”는 석연찮은 해명이었다. 우리 쪽 대처도 분명했다. “담당자인데 증거를 없앴기 때문에 증거인멸죄로 당신도 특검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분명히 전달했다. 마침내 베일에 가려있던 블랙리스트 자료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자료가 특검에 들어가게 됐다. 특검 조사를 받는 동안 조 장관도 입수된 자료를 보고 많이 놀랐을 것이다. 없애라고 지시한 문건이 특검 손에 들어가 있으니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증거가 내 손에도 있고 특검에도 가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른 채 청문회장에서 “모른다,아니다”라고 위증하는 조 장관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문화가 폭력이 돼선 안된다"고 이야기 하는 도종환 의원/사진 정준규

Q. 말로만 떠돌던 문화계 블랙리스트 실체가 마침내 드러났는데 심정이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화가 국력인 시대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도리어 문화가 폭력인 시대를 만들고 말았다. “나와 생각이 다르니 배제해야한다”는 생각은 문화사회가 아닌 야만사회에나 통용되는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에서 승리한 승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내 경쟁자를 지지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끝까지 용서치 않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옹졸하고 쩨쩨한 태도다. 자신에 반기를 들었다 하여 국가기관까지 동원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이들의 생각은 흑이든 백이든 둘 중 하나다. 내가 우(右)기 때문에 내 쪽에 있지 않은 모든 이들은 좌(左)라고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부터가 문제다. 예술인들은 좌우로 단정지어 생각할 수 없는 복잡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예술인들은 때론 저항적이지만 조직에 얽매이길 꺼려하고 지극히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작품을 만들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시를 낭독했으니 좌익"이라는 식의 편가르기는 분명 매카시즘이고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문화예술인들을 척결의 대상으로, 응징의 대상으로 삼는 건 그야말로 1970년 유신 통치방식이다.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와 같은 헌법 내용을 망각하고 과거 유신통치방식을 2010년대 적용하려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사진 정준규

Q.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구치소 청문회 등 사건과 연루된 이들을 가까이서 접했을 텐데 어떤 생각이 들었나?

대통령의 권한과 권력은 국민이 5년간 위임했을 뿐이다. 직권을 남용하거나 측근에게 위임하라고 준 권한과 권력이 아니다. 구치소 청문회 때 정호성 비서관에서 공문서를 최순실 씨에게 직접 전달한 게 맞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말했다. 문서는 인편을 통해 전달했고 문서를 받은 최순실 씨는 밑줄을 쳐가며 수정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최 씨가 문서를 수정할 만큼 정책적,행정적 능력이 있냐” 물었더니 “대중적인 언어로 고치는 능력은 있다”고 정 비서관이 답했다.

수석비서관회의든 모두발언이든 문건 대다수가 최 씨 손을 통해 수정된 게 사실이었다. 장ㆍ차관을 비롯한 인사자료도 최 씨에게 전달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정 비서관은 즉답을 피했지만 “대통령의 포괄적 지시가 있었다”고 답해 여운을 남겼다. 구치소청문회를 마치고 나오며 그림이 더욱 분명해졌다. 바깥으로 유출되선 안될 문서들이 수시로 인편을 통해 최 씨에게 전달된 것이다. 각종 국가 기밀문서를 볼 수 있는 위치니 무엇이 두려웠겠나.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취하고 각종 인사에 개입하고 그렇게 최 씨는 우리 사회의 기존 매뉴얼과 시스템을 철저히 붕괴시켜 나갔다. 말 그대로 국정농단이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Q. 도 의원이 쓴 ‘담쟁이’라는 시가 요즘 큰 인기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현실의 벽,특권의 벽, 양극화의 벽, 수많은 벽들 앞에 우린 놓여있다. 생존조건이 어려운 벽에 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게 담쟁이다.그 벽을 어떻게 넘어갈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기가 요즘인 것 같다. 지금의 절망적 풍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려 하는 건 국민들의 똑같은 마음이다. 국민들 마음 속에 그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담쟁이’라는 시가 요즘 더 사랑받는 게 아닌가 싶다. 담쟁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기준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불평등이 없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우린 만들 수 있다. 시련을 겪고 자란 담쟁이는 함께 손을 잡고 올라 분명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낼 것이다.

                                                                                         [대담/정리 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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