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니
이 또한 지나가리니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7.03.22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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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얘기다. 노○○ 영어선생님은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늘 쪽지시험을 봤다. 단어 다섯 개를 쓰는 받아쓰기였다. 시험보고, 채점하고, 종아리를 때리는 과정이 20분 안에 마무리됐다. 오답 한 개에 종아리 한 대였다. 당시 학급정원은 70명에 육박했다. 고교 수업시간은 50분이었으니, 적어도 30분의 수업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전광석화와 같아야 했다. 매의 도구도 길이가 짧았다. 스윙의 반경을 최단거리로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연타가 이뤄졌다.

만점을 받는 아이는 극소수였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급우들에게는 매 맞는 일이 통과의례였다. 짧고 가볍게 지나가길 바랄뿐, 아무 일이 없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 친구가 비명을 지르며 걸상에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을 보며 간질 발작이 아닌가 생각했다. 진상은 곧 밝혀졌다. 그 친구는 종아리에 자전거에 짐을 고정할 때 사용하는 굵은 고무줄을 감고 있었다.

체벌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날의 상황은 이랬다. 평소에는 수업시작 종이 울림과 동시에 교실 문을 열었던 노○○ 선생님이 그날따라 조금 늦게 들어왔다. 평소처럼 쪽지시험에 돌입하지도 않고, 무언가 일장훈계를 하셨다. 짐작한대로다. 친구는 종아리에 쥐가 났던 것이다. 고무줄이 친친 감긴 채로 꽤 시간이 흘렀으니 피가 통하지 않았을 테고 극도의 긴장상태가 오래 지속된 결과였을 것이다. 통과의례는 짧고 가볍게 지나가야 한다.

3월9일 밤부터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긴장 정도가 아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가 떠올라 가슴이 벌렁거린다. 3월10일 아침에는 상태가 극에 달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텔레비전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기다렸던 멘트가 흘러나왔다. 박수를 치거나 환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간절히 바랐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말해주듯 대통령으로서 권한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는 등 각종 형사법을 위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탄핵이 기각됐을 경우 대한민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거라는 염려가 더 컸다.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간에 촛불을 든 국민들과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 모두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예견되고 있었다. 그 소란이 두려웠다는 얘기가 아니다. 설사 탄핵이 기각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에게는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한 움큼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건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불거진 ‘최순실 게이트’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번져가는 상황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한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국정을 수행할 명분과 힘을 스스로 상실했다는 얘기다. 검찰조사, 심지어는 특검수사에 성실히 응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대면조사는커녕 서면조사도 받지 않았다. 주사아줌마 등 비밀손님들을 마음대로 드나들게 했던 청와대가 특검의 압수수색은 거부했다. 대통령 변호인단은 탄핵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볼모’ 삼아 이전투구를 하자는 것으로 보였다. 8대0, 전원일치 인용이 나온 이유였다.

대통령 탄핵 이후 대한민국 증시가 연일 고공행진이다. 코스피는 23개월 만에 2160선을 돌파했다.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거됐기 때문이란다.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된 삼성전자의 주식은 212만원 대까지 치솟았다. 맥쿼리증권은 삼성전자의 목표주가를 250만원으로 제시하며 내부 코멘트에서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은 반도체 호황과 함께 삼성전자를 한국 시장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주식으로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 짧고 가볍게 지나가길 바랄뿐, 아무 일이 없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잘 통과해 왔다. 스무 차례나 열린 촛불집회는 평화시위, 문화시위의 본보기로 전 세계에 한국의 저력을 알렸다. 5월9일 실시되는 조기 대통령선거가 이번 통과의례의 절정이자 결말이기를 소망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이재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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