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7.10.23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음의 도시가 된 체르노빌.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마음 속 생각이 읽히는 시대다. 원자탄, 수소탄을 핵무기라고 부르면서 원자핵에너지를 이용한 발전(發電) 행위는 ‘원자력 발전’으로 구분해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핵무기와 구분 없이 ‘핵 발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핵과 원자력을 구분해 부르는 사람들은 원자핵(Atomic Nuclear Energy)이 각각 전쟁과 에너지 생산이라는 다른 목적에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두 단어를 분리해 사용하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1953년 유엔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원자핵발전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원자력과 핵에 양다리를 걸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원자력은 원자 중에서도 원자핵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발전이든 무기든 같은 원리에서 에너지가 발생하며, 효율성이 높은 만큼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원자력 발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음에도 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폐기물을 굳이 ‘핵폐기물’이라고 불러온 이유가 있다. 원자핵 발전이 저비용, 고효율이라고 하지만 핵 쓰레기 처리에 드는 비용과 시간은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화력이나 원자력은 모두 증기로 터빈을 돌리는데 원자핵 발전에서 물을 데우는 것은 핵 연료봉이다. 사용이 끝난 핵 연료봉은 엄청난 방사능에 노출이 돼있어서 원상태로 돌아가는데 10만년이 걸린다. 1966년부터 원자핵 발전을 시작한 일본에는 폐기된 핵 연료봉이 1만8000톤이나 쌓여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끝나고 장롱 속 붉은악마 티셔츠를 모아 아프리카로 보내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헐벗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모은 수십만 장의 티셔츠가 배에 실려 아프리카로 갔다. 하지만 옷공장들이 문을 닫고 옷가게, 의류수선 등의 자영업 등이 궤멸했다는 뒷얘기가 들린다.

비슷한 사례가 TV다큐멘터리를 통해 방영됐다. 유럽 몇 나라들이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재활용 의류를 보냈다. 하지만 그 옷들은 무상 분배되지 않고 독재정권의 뒷주머니를 채우는데 사용됐다. 보츠와나 중년남성의 절규가 방송을 탔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옷 만드는 공장과 기술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원자핵 발전이 에너지 평등에 기여한다는 ‘선한 의도’를 믿어주는 것으로 하자. 하지만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없다. 1986년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전사고는 방사능 관련 사망자가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현장은 아직도 죽음의 땅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사고는 낡은 시설도 문제였지만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진도 9.0의 지진, 쓰나미로 촉발된 것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1957년 구 소련 마야크, 1969년 스위스 루센스,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에서도 원자핵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반해 지금까지 실전에 사용된 핵무기는 1945년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두 발이 전부다. 물론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인류는 공멸이다. 다만 핵무기는 얽히고설킨 국제관계가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발사된 핵무기를 무력화시키려는 제어기술도 진화 중이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북한이 주고받는 말폭탄을 보면 핵은 긴장을 팔아먹는 ‘워 비즈니스(War Business)’의 수단이기도 하다. 신고리 원전 공사재개가 결정됐다. 숙의 민주주의를 거쳤으니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진리는 ‘탈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