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집사의 여행과 우리들의 남은 인생
늙은 집사의 여행과 우리들의 남은 인생
  • 박진희
  • 승인 2017.10.27 17: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나의 독서는 매우 게을러서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는 모르고 지내다 수상소식을 접하면 그제야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도 마찬가지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치고는 젊은 나의 63세. 일본계 영국인이라는 독특한 태생. 우리의 환상 밑의 심연을 드러냈다는 심사평을 받은 작가. 기대를 잔뜩 품고 그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을 읽어본다.

사랑도 명예도 남김없이,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간다. 소멸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없다. 가요 가사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대충 살자는 게 아니라 잘 살아 보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잘 산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고 명예를 얻고자 하며 진정한 사랑을 원하기도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기준과 삶의 목표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분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삶의 가치 기준을 늘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며 불안해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맹목적으로 내면화된 기성세대의 경쟁적 질서일 뿐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적 가치도 영원할 순 없다.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실도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흔희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따라 역사를 구분하기도, 사회제도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간 사회를 혹은 개인의 삶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타인과 역사와 사회를 관음 한다. 소설은 늘 우리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타인의 삶, 과거와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소설이면 좋은 평가를 얻게 된다.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독특한 소재와 편안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책이다.

1956년 달링턴 홀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근대화의 과정을 한 귀족 집안의 집사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사회와 역사를 조망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20세기 초 ‘달링턴 홀’의 집사로 살아야 했던 스티븐슨의 내면을 통해 품격과 명예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이 소설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한다. 작가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고위하고 품격 있는 삶을 살아 온 한 귀족 가문의 집사를 통해 인간적 진실과 내면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하다.

영국인의 문화와 역사적 상황이 잘 녹아 있는 소설이지만 제2차 대전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인칭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스티븐슨은 총무로 일했던 켄턴 양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달링턴 홀의 주인이 바뀌고 미국인 패러데이 어르신을 모시게 된 스티븐슨은 며칠간의 여행을 떠난다.

달링턴 홀과 함께 한 묶음으로 집의 일부로 살아온 집사의 여행은 낯설기 그지없다. 오래 전 결혼하기 위해 달링턴 홀을 떠난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 중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달링턴 홀에 그녀의 완벽한 일솜씨가 필요할 뿐이라고 다짐하는 스티븐슨의 태도와 여행 중에 과거 회상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제각각 다른 맥락들을 읽어낼 수 있다. 켄턴양의 사랑, 달링턴 홀의 역사, 영국의 귀족 문화,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등.

며칠 간 영국의 곳곳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늙은 영감이 되어버린 집사 스티븐슨의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 온 삶을 정리하게 된다. 제목처럼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스티븐슨이라면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철저하게 주인을 모시는 삶을 살던 집사는 빈틈없이 일처리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기도 하고 켄턴 양을 외면하기도 한다. 그것이 고통스런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품격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나가버린 시대의 중심에서 서 있던 스티븐슨이 이제 주인이 바뀐 달링턴 홀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궁금하지는 않다. 여행을 마치면서 새로 바뀐 주인을 잘 모시기 위해 농담의 기술을 익혀야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슨에게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과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소설을 통해 현재 우리들의 삶을 돌아볼 보길 바란다.

청주 꿈꾸는책방에서 디자인 팀장으로 근무한다. 남편인 정도선 점장과 매번 “이 책을 진열해야 해!” “아니야 이 책을 진열해야 해!”라고 티격태격하면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세계여행의 기록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를 썼고 아름다운 청주에 녹아들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