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선생 순국일 찾았는데 추모식은 관행대로?
이상설 선생 순국일 찾았는데 추모식은 관행대로?
  • 박상철 기자
  • 승인 2018.03.1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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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문서·당시 신문·전보 등 4월1일이라는데 진천군 추모식은 22일에
박걸순 교수 ”80억 짜리 기념관 지을 게 아니라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헤이그 특사 3인. 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사진=국가보훈처 블로그

“이러니 타국에서 순국한 우국지사가 땅속에서도 편히 눈을 감으시겠는가.” 역사학자인 박걸순 충북대 교수의 한탄이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헤이그 밀사’로 활약한 애국지사 이상설 선생(1870∼1917)의 순국일이 4월1일이라는 구체적이 증거가 지난해 학술토론회에서 제시됐음에도 진천군이 관행대로 오는 4월22,23일 추모행사를 진행하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해 8월14일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서 주제 발표문을 통해 상설 선생의 순국일이 1917년 4월22일 아닌 4월1일이라는 근거를 제시한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독립이 되지 않으면 제사도 지내지 말라’셨던 우국지사의 영전에 고개를 들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 교수는 세종경제뉴스와 통화에서 순국일이 4월1일이라는 공신력 있는 증거 세 가지를 제시했다. 일제의 정보보고 문서와 매일신보 기사, 서거 소식을 전한 독립 운동가들의 전보(電報)가 그것이다.

박 교수는 “1917년 4월 4일자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일제의 정보보고 문서에 따르면 선생은 4월1일 러시아 니콜리스크 우스리스크시에서 병사한 것으로 돼 있고, 그 해 블라디보스토크 파견원도 선생이 폐환(肺患)으로 대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던 중 4월1일 오후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또한 “매일신보의 1917년 4월17일자 <이상설(李相卨)이 로령(露領)에 객사(客死)> 2단 기사에 의하면 그가 신병에 걸려 음력 윤 2월10일 시베리아의 니콜라에프스크에서 사망했는데, 같은 달 15일 경성에 있는 아우에게 부음이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며 “1917년 윤 2월10일은 양력 4월1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연해주 독립 운동가들이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세력에게 보낸 ‘이상설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전보에서도 4월1일자로 기록돼 있다”며 “명백한 기록이 있는데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바로 잡지 않으면 80억 짜리 기념관을 지은들 무슨 소용있냐”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독립 운동을 했던 김구, 신채호, 안창호 선생들도 다 돌아가신 날에 추모식을 지내고 있다. 특히 이상설 선생의 유언 중 ‘조국이 독립될 때까지는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했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진천군에서도 군민 세금으로 지원을 하고 있는 만큼 이를 적극 나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이에 대해 보재이상설기념사업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연우 공주대 교수는 진천읍사무소가 보유하고 있는 이상설 선생의 제적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진천읍사무소에 보관 중인 이상설 선생이 제적부를 보면 돌아가신 날이 음력 3월 2일로 기록돼 있다. 이를 양력으로 바꿔보면 4월22일쯤이 된다”며 “지난 수년간 22일에 추모식을 지내왔지만 경주 이씨 문중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상설 선생은 보통 일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지내는 제사와는 다르다. 훌륭한 선비나 학자들은 돌아가신 날짜가 아니라 좋은 날을 택해서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이상설 선생은 제사가 아니라 추모식인 만큼 날을 택해서 지내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관례처럼 22일에 추모식을 지내 온 만큼 올해도 22일 진행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연말이나 내년 연초에 문중을 포함해 각계 각층의 전문가를 한데 모아 공개적으로 간담회를 열어 서거일이 언젠지 따져볼 생각이다. 그때는 박걸순 교수도 부르겠다”고 말했다.

박걸순 교수는 “해방 후에 만들어진 제적부다. 잘못된 제적부 기록을 가지고 추모식 날짜를 고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진천군 관계자는 이같은 논란에 대해 “박걸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추모식을 주최하는 기념사업회는 생각이 다른 것으로 안다. 우리는 기념사업회의 의견을 따를뿐”이라고 대답했다.  

한편, 이상설 선생은 진천읍 산척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이준·이위종 열사와 함께 국권 회복을 국제여론에 호소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민족교육에 앞장서다 1917년 47살에 망명지인 연해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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