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근질근질 할 때, 마음의 때를 벗기러 오라
삶이 근질근질 할 때, 마음의 때를 벗기러 오라
  • 권영진
  • 승인 2019.03.0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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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탕은 아니지만 남녀혼탕카페 청주시 상당로 ‘목간카페’

<해피진의 꺼리>

옛날 대중목욕탕이 흔하지 않던 시골에서는 커다랗고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그 커다란 고무대야는 쓰임새가 다양했는데, 비 오는 날이면 빗물을 받아 놓기도 했고, 이불을 빨기도 했으며, 김장철에는 깨끗이 씻어서 배추를 절이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고무대야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찬물로 온도를 맞춰 목간통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1970~1980년대 아이들의 목간은 대부분이 고무대야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고 목욕도 했던 기억도 있다.

목욕탕이 있었다는 기록은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한국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몸을 청결히 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절에 목욕소를 설치하여 목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스님과 양반 외에는 이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민간에서는 온천물을 이용한 목욕소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대식 대중목욕탕이 도입된 시기는 1925년으로, 서울에 최초로 생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목욕탕 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당시에는 알몸을 어찌 남에게 보여주나 해서 정착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목욕시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돈을 내고 목욕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 목욕탕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다. 그 후 시대가 변하면서 목욕탕은 찜질방 시설이나 놀이시설을 완비한 대형 레저타운 으로 변모해 갔다.

오늘 소개할 맛있는 꺼리는 청주시 북문로에 위치한 목간카페이다. 목간카페는 1988년 문을 연 청주 최초이자 최대의 대중목욕탕이었던 학천탕을 카페로 탈바꿈한 것이다. 목욕탕이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 대부분의 목욕탕은 단층이나 저층으로 만들었는데, 청주 시내 한가운데 8층으로 지어진 최신식 대중목욕탕이 생긴 것이다.

당시 학천탕은 목욕탕 전용 건물로는 국내 최대의 건축물이었는데 88올림픽 메인스타디움, 국립 청주박물관 등 훌륭한 건축물들을 다수 디자인한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으로 더 유명하다. 학천탕은 현재의 목간카페 쥔장의 아버지(故 박학래 옹, 아래 해설 참조)께서 김수근 건축가를 찾아가 아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건물을 지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받아들여 설계를 해주었다고 한다.

현재의 목간카페는 8층 건물 중 1층과 2층의 남탕을 개조한 것으로 건축물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카페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 카페라고 한다. 아직도 3~4층은 남탕으로 영업을 계속 하고 있다. 쥔장은 1년 전 계속되는 경영난에 목욕탕을 축소하여 카페를 운영하기로 마음먹고 디자인 책자와 많은 업소를 다니며 배우고 익혀 셀프 디자인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때타올을 이어 붙여 액자를 만든다던가, 목욕타올을 기둥에 걸어 자연스럽게 내렸더니 훌륭한 디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의 흔적은 1년이 넘게 기록한 설계도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수없이 접었다 폈다 해서 너덜해진 도면에는 ‘20171223, 겨울 날씨 치고는 봄 날씨 같은 석양이 따듯하게 비치는 오후 전기(조명) 도면을 그리기 전.’ 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평생 남탕을 구경해보지 못한 여학생들과 아가씨들은 저마다 신기하다, 대박이다, 웃긴다.’ 라는 말들을 허공에 뿌리며 카페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때로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다녀간다는 흔적을 남겼다. 카페입구에 붙여진 남녀혼탕카페라는 글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커피나 음료를 주문하면 일본의 온천탕 등에서 물바가지 용도로 쓰는 예쁜 바가지에 음료와 함께 구운 계란을 인원수에 맞춰 함께 준다. 목욕탕에 들르면 사이다에 계란을 먹던 추억을 살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중앙에는 커다란 욕조가 있는데 이곳은 온탕과 냉탕이 있던 자리이고 각각 앉아서 때를 밀던 샤워기 앞에는 벤치와 탁자를 놓고 예쁜 거울을 붙여 목욕탕 그대로의 모습을 살렸다. 몸이 근질근질한 오후, 목간카페에 가서 추억에 빠져보자.

 

목간카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115번길 46 , 전화문의: 043-255-3111

권영진은 해피진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파워블로거다. 충북도민홍보대사, SNS 서포터로 활동 중이며 직장인 극단 이바디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진짜 직업은 평범한 직장인.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를 연재한다.

 

 

 

[해설]일제강점기 뽀이에서 목욕업계의 대부가 된 박학래.


 

201088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박학래 전 충북도의회 의원은 소년시절이었던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사장으로 있던 아사이후로야(旭湯·목욕탕 이름)뽀이였다. 1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목욕탕 종업원으로 거친 세파 속에 뛰어들어 20년만에 자신이 종업원으로 있던 목욕탕의 사장이 된 박 전 의원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그 목욕탕(남문로 1가 제일목욕탕)의 사장이었다.

박 전 의원은 청주에서만 목욕탕 4(약수탕, 학천탕, 학천랜드)를 운영해 이 바닥의 큰 손으로 통했지만, 미수의 삶을 지탱해 온 또 하나의 수레바퀴는 평생을 걸어온 정치인생이었다. 동학운동을 했던 조부의 영향을 받아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어린 나이에 싹튼 민족의식이 정치를 통한 현실참여로 발전한 것이다.

또 노동자, 농민 등 소외계층에 대한 지지의식으로 발전해 유신치하 3선 반대 운동 등 외곬 야당의 길을 걷게 했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우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과 친교를 맺은 시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1971년 김 전 대통령이 신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함에 따라 선거운동을 계기로 동지적 관계가 된다.

이후 박 전 의원은 대선패배 후 정권의 탄압을 받던 김 전 대통령의 장남 홍일씨(전 국회의원)를 자신이 운영하던 제일여관(목욕탕)에서 8개월가량 보호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던 19807월부터 198212월까지는 서슬 퍼렇던 정권의 감시를 뚫고 옥중수발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학래 전 의원은 19566.25 전쟁의 폐허 위에 문을 연 제2대 청주시의회 의원을 시작으로, 3대 청주시의원을 지냈다. 1991년 지방의회 부활 이후에는 5·6대 충청북도의회 의원으로 재임했으며 열린우리당·민주당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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