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노동의 단면, 안전 사각지대 배달대행 노동자
21세기 노동의 단면, 안전 사각지대 배달대행 노동자
  • 류현철 부센터장
  • 승인 2019.09.0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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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일환경건강센터 부센터장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모 카드 회사의 광고가 등장한 것은 2002년이었다. IMF 체제를 막 벗어난 시기에 등장하여 열심히 일하던 이들에게 들이닥쳤던 정리해고를 떠올리게 한다는 세평도 있었으나 오로지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勤勞者)들이어야 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일뿐만 아니라 삶을 위한 여가의 가치가 부각되는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카피이기도 했다. 이제는 바야흐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시대이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 당신이 일에서 벗어난 여가의 시공간은 여전히 또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이 요구된다. 노동자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해 일하는 수많은 서비스 노동자들이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당신에게 스마트폰 배달 애플리케이션은 필수가 된다. 이제 당신의 온전한 휴식을 위해 플랫폼 노동이 가동되어야 하는 찰나이다. (물론 식사시간조차 아껴 노동의 밀도를 높이려는 경우에도 배달 노동이 기능하지만) 배달대행 노동자들은 다른 이들의 온전한 여가를 떠받치는 노동을 수행한다.

4차 산업 시대 플랫폼 노동자로서 배달대행 노동자들이 기후위기 시대에 일상화된 폭염으로 인한 위험을 이야기한다는 것, 21세기 노동의 단면이기도 하다. 직업의학을 다루고 환경의학을 다루는 직업환경의학을 업으로 하는 필자로서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질병관리본부의 보고에 따르면 2010년대 들어서 여름철 기온에 따라 매년 500명에서 1,000명 내외에의 온열 질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2,125명, 2018년에는 4,526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2018년 통계에 따르면 주로 낮 시간대(12~17시에 46%)에 실외(73.4%)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열악한 주거 환경이나 노동조건에 놓인 이들일수록 위험의 크기가 커진다. 온열 질환은 열탈진, 일사병, 심하면 사망에도 이르기도 하는 열사병까지 다양하다. 불볕더위는 배달노동자뿐만 아니라 건설 노동자, 조선 노동자 등 적절한 작업환경 조건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여러 분야의 노동자들에게 건강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에서도 기후변화와 동반하여 옥외노동자들의 온열 질환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폭염기 옥외노동자의 건강보호 가이드를 마련하고 있지만, 배달대행 노동자들의 특수한 고용조건과 노동과정의 특성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달성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배달대행 노동자들은 도로의 복사열이나 자동차 등 내연기관이 내뿜는 열기 등으로 폭염의 부담이 높아지고, 실제로 라이더 유니온 조합원들이 배달 서비스 중 오토바이 위에서 측정한 온도는 40℃를 훨씬 뛰어넘어 48.9℃까지 치솟는 것을 SNS에서 인증하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서 안전을 위해 헬멧이나 보호장구를 착용하게 되면 체감 온도는 더욱 높아진다. 중증의 온열 질환에 이르지 않더라도 탈수 증상이 지속되거나 일사병의 초기 증상이라도 나타나면 오토바이를 운행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다. 실제로 폭염이나 기상조건이 안 좋은 경우에 배달 콜(호출) 수는 증가하고 적정 생계비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뛰고 달려야 한다면, 이들에게는 물도 그늘도 휴식도 갖추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래서 라이더 유니온의 주장은 폭염기나 이상기후 속에서 무리한 배달 업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될 수준의 적정한 안전배달료를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안전과 건강의 문제가 단순한 비용이나 수당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에서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에 대해서 정당한 가치를 받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돈을 더 받고 더 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적정 수준의 노동을 통해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폭염기에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작업을 중지하는 것처럼 유사한 시기에 배달을 자제하는 사회적 합의도 필요한 것이다. 모든 노동자의 워라밸을 존중하여 적정한 수준의 여가를 보장하고, 그 노동자들의 여가를 위한 노동에도 정당한 급부가 주어져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더우면 그늘에도 잠시 쉬어가고 목을 축이고, 눈비가 내리면 스스로 콜 수를 줄이고 안전하게 배달대행 업무를 수행해도 되는 수준의 노동의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들을 쓰러지게 만드는 열사병의 원인은 태양이 아니다. 날로 뜨거워지는 여름과 기후변화에 대해서 전 지구적인 대응과 대안 마련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손상과 죽음의 책임을 태양과 기후에 물을 수는 없다. 열사병의 원인은 노동자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조건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미비한 제도에 있다. 플랫폼 노동을 통해서 안정적으로 생활임금 유지가 가능하지 않다면 개인은 노동시간이나 노동밀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며, 파편화된 노동에서 발생하는 건강상의 위험은 관리하기 어렵다. 과로와 위험을 감수하게 만드는 저임금 구조를 개선하여 적정임금과 적정노동시간을 사회적으로 결정하고, 소위 새로운 노동의 출발점이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노동시간과 작업환경 관리에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새롭고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 일환경건강센터는 안전/보건/환경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주)SK하이닉스의 민간지원으로 설립한 비영리법인인 (재)숲과나눔이 지역사회의 일터를 보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설립한 센터입니다.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 특수고용 노동자들뿐 아니라 자영업자, 사업주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일터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직업보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배달대행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이동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에게 휴게공간과 더불어 건강상담, 근골격계질환 관리, 심리상담, 직업병 및 산재 상담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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