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교수의 치유의 인문학] 생각이 바뀌었어요
[권희돈 교수의 치유의 인문학] 생각이 바뀌었어요
  • 권희돈 교수
  • 승인 2020.03.03 1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학창시절 책상 위에 붙여놓고 나 자신을 담금질하던 문구다. 써 붙여만 놓았지 운명을 바꿀 만큼의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늘 작심삼일(作心三日)이었다. 소싯적에 한 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루를 넘기지 못하는 다이어트, 끽연 횟수보다 더 많은 금연, 새 해 첫날의 다짐 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슬몃 서랍 속에 갇혔다 증발하곤 하였다.

혹자는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관대한 이기심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나는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말한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면 삶이 얼마나 빡빡하겠는가. 

무심천 뚝방을 걷는데 드르륵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스님 될 거예요. 비구니요. 일 주일 후에 들어간다고 약속했어요. 우울감이 심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님이 되겠다는 말은 지금 너무 힘들어 죽겠다는 뜻이다.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세로토닌 같은 말이 없을까? 화두를 꺼내놓고 무심히 걸었다. 황새가 날아가고 아파트가 지나가고 나의 그림자가 길가의 풀잎을 덮을 때까지 걷다가 답신을 보냈다.

마음의 길을 찾으셨나봐요. 가셨다가 그리우면 다시 오세요. 누가 묻거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세요. 나중에 들은 말인데,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세요.’ 이 문장에서 그녀는 정말 마음이 편해지더란다. 사실이 그렇다. 생각이 바꾸었다는 말은 자신이 한 말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자중자애(自重自愛),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이 친구 살아 있군 그래. 살아 있다니. 자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00살까지만 살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자네 지금 00살이지 않은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년 전의 내 말임이 분명하다. 땅끝 마을 방파제에서 밤새 소주에 빗물과 바닷바람을 섞어 마시며 한 말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6개월 사이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을 잃었다. 이제사 말하지만 상실의 아픔이 해일처럼 밀려와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꽃이 피는 줄도 단풍이 지는 줄도 몰랐었다. 이 긴 스토리를 친구에게 말하긴 그렇고 해서 그냥 나오는 대로 말 해 버렸다.

여보게 친구,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네. 친구가 나를 실없는 사람이라든가 믿지 못할 사람이라든가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지 못할 사람이라든가 어떤 평가를 내리든 그건 그 친구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도덕보다도 신의보다도 육법전서보다도 지고지존한 율법보다도 내가 살고 봐야 하니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정에서 지동설을 부정하고  나오면서 한 말이다. 만약 그가 끝까지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과학적 신조를 지켰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사형당했으리라. 나는 그가 신조를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지엄한 재판정에서 살아나온 갈릴레오 다운 지혜를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침묵보다는 차리리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이 솔직해 보인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이 격언의 의미는 말을 신중하게 하란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침묵만을 지킨다면 지구는 묵언수행(黙言修行)하는 사원과 같을 것이다. 그런 혀(舌)도 좋지만 실수도 좀 하는 혀가, 실수하고 후회하는 그런 사회가 살 만한 사회인 듯싶다. 그런데 그 실수가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될 때는 길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럴 때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열쇠가 될 만한 말을 찾아야 한다면 나는 이 말을 권하고 싶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살아야 하니까. 내가 편해져야 하니까. 좋은 평가를 받기보다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하니까. 나는 나일뿐이니까. 

권희돈 교수는 청주대 명예교수, 문학테라피스트. 대학에서 은퇴하기 전에는 교사로 교수로 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을 차례로 가르쳐 왔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는 문학테라피스트로 마음이 아픈 이들과 인문학을 통해서 치유하고 소통한다. 이들이 상처를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낼 때마다, 보람찬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긍지를 갖는다고 한다. 이에 관한 그의 저술 『사람을 배우다』는 장안의 화제작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