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장'의 눈물
'임계장'의 눈물
  • 박상철
  • 승인 2020.05.19 2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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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퇴직 후 얻은 일터에서 ‘임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임계장은 ‘고다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르고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고해서 붙은 말이다.”

최근 한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민으로부터 폭행, 폭언을 당한 뒤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있을 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고질적인 사회 문제다.

이번 사건으로 주목받는 책이 있다.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임계장 이야기(저자 조정진)’란 책이다. 저자 조정진 씨는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퇴직 후 4년째 시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버스 회사 배차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관리원 겸 경비원을 거쳐 버스터미널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쓰러져 해고됐다. 7개월간의 투병 생활 이후 지금은 주상복합건물에서 경비원 겸 청소원 업무를 맡고 있다.

책에서는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빠짐없이 메모로 남겨뒀던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무엇보다 수십만에 달하는 노인 노동자들이 믿기지 않는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없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는 이유는 경비원에 대한 갑질 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매년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주택관리공단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6월까지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폭언·폭행 건수는 2923건에 달했다. 주취폭언·폭행이 1382건으로 전체의 47.3%였고 흉기협박도 24건이나 발생했다. 경비원에 대한 폭언·폭행은 최근 5년간 15배나 증가했다. 

본 기자도 2018년 3월과 2019년 4월 <주차딱지 붙였다고 폭행에 권고사직>, <"너 오늘 죽여 버리겠어" ○○제약 간부의 갑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이 두 기사는 경비원에 대한 갑질을 다뤘다. 당시를 회상하면 취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기자라는 직업을 갖기 전 한때 뉴스를 장식하던 경비원에 대한 갑질 소식은 내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 사람들이 이야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듣고 있자니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 피해자들은 우리의 가족 혹은 이웃일 수 있다. 즉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비원을 둘러싼 갑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 전문가들은 고용 구조적 문제라고 분석한다. 입주자들은 대표회의를 통해 용역업체를 결정하고, 용역업체는 경비원과 단기 계약을 체결한다. 이 과정에서 입주자들은 막강한 권한을 획득해 갑·을·병의 권력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갑질의 부당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를 방치하나 묵인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법과 제도의 개선에 앞서 이번 사건 재발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고인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남긴 유서, 서너 줄밖에 안 되는 그 마지막 외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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