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교수의 치유의 인문학] 아름다운 청자(聽者)가 되자
[권희돈 교수의 치유의 인문학] 아름다운 청자(聽者)가 되자
  • 권희돈교수
  • 승인 2020.09.08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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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귀처럼 커다란 귀(-)와 열 개의 완전한 눈(-)으로, 말하는 사람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말하는 사람과 한 마음(-)이 되어 듣는 것()이 경청(傾聽)이다. 말하는 사람과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공감의 태도로 듣는 동안 일체 나의 판단을 중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자신의 판단 없이 자신을 내맡기고 들어주는 경청은 말하는 이를 치유한다. 말하는 이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의 속에서 독으로 자라고 있는 상처가 다 쏟아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인다 해도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말을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앞서서일 것이다. 그러다가 마음에 고통이 생기면 내 일처럼 열심히 들어 줄 사람을 찾는다.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 사업 실패, 불만스런 고용인 혹은 상사, 친구의 배반, 가족 간의 불화에 이르기까지 괴로움이 생기면 경청자를 찾기 마련이다.

이 지역 NGO센터 치유커뮤니티에 한 할머니가 왔다. 할머니의 긴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의 끝자락에 남은 것은 독거노인, 고액세금체불자, 신용불량자, 교통사고 5급 장애자라는 빨간 딱지뿐입니다. 세금 고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잘 나갈 때는 알아보는 이 많았으나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문학치유 모임을 이끌어 가시는 선생님만 귀 기울여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얼마나 주변 사람들이 이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나고 나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을까. 밖으로 드러난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듯, 밖으로 드러난 아픔도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털어내면 연민의 마음으로 듣게 된다. 듣는 사람의 숫자만큼 아픔은 나누어진다.

늘 소외만 받아온 할머니를 지구 위에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이끈 것은 오직 들어주는 것하나뿐이었다. 이 할머니의 절절한 말이 보여주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사실은 이 할머니가 치유되면서 할머니에게 상처를 준 이들과의 관계가 치유되었다. 경청은 이처럼 자신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관계를 치유한다. 가장 깊은 치유는 가장 깊은 괴로움과 함께 한다. 상대의 고통에 귀 기울이다 보면 자신 자신에게도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미리암 그린스팬, 감정공부) 경청하고 난 후에야 상대방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타인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바라는 모습의 당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마르틴 파도바니, 상처 입은 관계의 치유)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민, 고통, 슬픔, 상처, 상실감을 듣다 보면 자신의 고통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돈을 내고서라도 가서 들으라고 한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경청자가 될 수 있다. 단연코 말하건대 경청자는 행복하다. 영문단어 Listen을 알파벳으로 하나하나 풀어보면 경청의 자세와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Look - 상대를 집중적으로 바라보며

Ignore everything - 만사를 제쳐두고

Suspend jdgement - 판단도 미루고

Take notes - 메모하면서

Empathize - 공감하면서

No but - 하지만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듣는 것이 경청이다. 자신을 내맡기고 들어주고, 편견이나 판단 없이 들어주고, 자신을 공명통처럼 온전히 비우고 공감하는 자세로 들을 때 완전한 커뮤니케이션, 완전한 치유,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듣는 경청의 태도는 말하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줌으로 말하는 사람이 경계심을 품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술술 풀어낸다. 자신의 속내를 술술 풀어내는 사이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독()이 증발해 버린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말하는 이의 병이 80%는 치유된다고 하는데 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경청은 치유이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신의 병인 암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병인 우울증이다. 암도 우울증도 충격적인 사건 후에 받는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 중 80%가 우울증으로 자살한다고 한다. 우울증은 기운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저하되며, 불면에 시달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히며, 까닭 없이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하며, 반복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증세를 보이는 무서운 병이다.

신경정신과의사들은 우울증은 이렇게 치료해야 한다고 권한다. 1)환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주어라. 2)비난하지 말고 충고하지 말아라. 3)의사의 치료를 권하라. 4)말과 행동의 변화를 살펴라. 주목할 점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라는 말이 1번 순위에 올라 있다는 점이다.

 

잘 들어주어서 말하는 이를 치유하고, 듣는 자신도 치유하고, 상처받은 관계를 치유하고, 마음의 암 우울증도 치유하는 아름다운 청자(聽者)가 되어보면 어떨까?(時雨)

 

 


권희돈 교수는 청주대 명예교수, 문학테라피스트. 대학에서 은퇴하기 전에는 교사로 교수로 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을 차례로 가르쳐 왔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는 문학테라피스트로 마음이 아픈 이들과 인문학을 통해서 치유하고 소통한다. 이들이 상처를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낼 때마다, 보람찬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긍지를 갖는다고 한다. 이에 관한 그의 저술 『사람을 배우다』는 장안의 화제작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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