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황혼의 미학
[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황혼의 미학
  • 권희돈교수
  • 승인 2020.11.09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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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40년 지기 친구들과 연극 관람을 마치고 치맥집을 들렀다. 넓은 홀은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우리 일행이 앉을 만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런데 주인인 듯한 중년 여성과 아르바이트생인 듯한 젊은 처자가 자리가 없다며 우리를 가로막는다. 저기 자리가 있지 않으냐고 내가 따지는 사이 친구들은 나가버렸다. 한 친구가 다시 들어와서 내 옷소매를 끌며 여기는 젊은이들이 들어오는 곳이지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라고 한다. 친구들은 벌써 문밖의 허름한 플라스틱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서 나보고 나무란다. 어디를 가도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싫어해. 
  
역사학자이며 미래학자이기도 했던 토인비의 말이 떠오른다. 
  
“코리아가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가 있다면 어른을 공경하는 일이다.” 

호주 여행 중에 택시기사의 깍듯한 태도 때문에 여행 내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공항에서 줄을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내 차례가 왔다. 택시기사가 택시에서 내리는 노객에게 정중하게 대하였다. 문을 열어주고 짐을 챙겨주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님 참 친절하시네요, 하고 말을 건넸다. ‘저 노인분들이 열심히 일해서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잘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노인분들은 젊은이들한테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 분들입니다.’

아무래도 토인비의 말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코리아는 인류사회에 기여할 단 하나의 문화를 잃어버렸다.” 
  
열심히 일하기로 말하면 우리 일행도 호주의 노인들 못지 않을 것이다. 해방 전후에 태어나서 유년기에 6.25를 체험하고 청소년기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상급학교로 공장으로 진출하였다. 방직공장에서 염색공장에서 코피 터지며 밤새워 일해 온 친구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고엽제로 지금까지 고통받는 친구들, DMZ에서 지뢰를 밟은 친구, 열사의 사막에서 모랫바람에 온몸을 그을린 친구, 개발독재의 그늘에서 신음하며 공부하던 친구 등 싸우면서 일하고 싸우면서 공부해온 우리 세대들이다. 그런데 어느 새 노년에 이르러 사회의 왕따가 되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값진 삶이라 해도,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말하면 추억팔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분주하다. 

이 나라에서 노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달의 뒷면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땐 부모가 돌보아 주었다. 늙어서는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는 노년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사랑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몇 해 전 한 노인이 ‘외로워서 못 살겠다’ 는 한 마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는 기사가 대서특필 된 적이 있다. 노인은 현금을 금고 속에 꼭꼭 숨겨둔 채였다. 슬픈 일이지만 이 사건은 노년의 삶을 걱정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금을 꼭 움켜쥐고 있을 게 아니라, 친구들이나 자녀들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손자손녀 용돈도 좀 주고, 자기보다 더 외로운 처지에 있는 이에게 봉사도 좀 했더라면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재미있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내려놓는다는 것(well-down)은 내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나뭇잎이 서서히 초록을 쏟아내고 단풍으로 변하듯이, 노년에는 서서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밖에 내어놓아야 세상이 보인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고 노년을 외롭지 않게 사는 ‘황혼의 미학’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할까? 내가 나를 돌보지 않는데 누가 나를 돌봐 줄까?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한다면 세상은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아까운 곳이고 따뜻한 곳이다.(時雨)


권희돈 교수는 청주대 명예교수, 문학테라피스트. 대학에서 은퇴하기 전에는 교사로 교수로 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을 차례로 가르쳐 왔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는 문학테라피스트로 마음이 아픈 이들과 인문학을 통해서 치유하고 소통한다. 이들이 상처를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낼 때마다, 보람찬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긍지를 갖는다고 한다. 이에 관한 그의 저술 『사람을 배우다』는 장안의 화제작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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