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 이야기 ④] - 괴산 연풍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 이야기 ④] - 괴산 연풍
  • 변광섭
  • 승인 2020.11.0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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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 젖고 역사문화에 젖는 마을 한 바퀴

골목길의 반대말은 신작로다. 신작로는 큰 길, 새로 난 길을 뜻한다. 신작로는 빠른 것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근대의 상징이다. 더 빨리 지나가기 위해 길을 넓히고 바닥에 아스팔트를 깐다. 잡초들도 없애고 돌부리도 없앤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옛 추억도 사라진다. 오직 빨리 이동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추억도 사랑도 없다. 그리워해야 하는 이유도 없다.

내가 살았던 고향이나 골목길의 추억이 살아지면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까. 지금의 아파트문화 속에서는 어떤 것을 기념하고 있을까. 그리운 것은 농촌에 있다며, 농촌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고 웅변하는 이유다. 그런데 지금 농촌이 벼랑 끝에 서 있다. 문명과 자본이 들어가면서 가슴 시리고 아팠던 추억도, 낡고 누추한 공간도 사라지고 있다.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이 담겨있는데 당장의 이기에 짓밟히고 있다. 도시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농촌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농촌도 치열한 전장이 돼 버렸다. 골목길이 아니라 신작로가 되어가고 있다.

골목길은 오래된 마을의 실핏줄이다. 옛 사람들의 삶의 풍경과 냄새가 깃들어 있다. 큰 길 보다 얕지만 느리고 깊다. 골목을 잃어버리면, 골목을 품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사랑도 추억도 상처도 없다. 골목길은 역사와 풍경을 담고 느림의 미학을 상징한다. 인문학적 성찰이 가능한 곳이다. 그곳만의 혼(魂)이 담겨있고 빛바랜 관습이 살아있다. 마을의 역사가 깊을수록 골목도 나이가 많다. 나이가 많은 만큼 그 흔적 또한 다채롭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골목에서 시작해야 한다. 도시재생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고, 정겨운 농촌의 숨결을 살려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괴산 연풍면 소재지 일원을 걸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연풍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자연 속에 있으며 역사의 심연과 함께 예술의 꿈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렇지만 모든 풍경 속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다. 연풍이 그러하다. 아래로 문경새재와 이화령, 위로는 괴산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산속의 마을이다. 그 옛날 천주교 교인들이 은거를 하거나 선교할 때 지나던 곳이다.

1801년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을 탄압했던 이른바 신유박해 이후 교인들은 은거할 곳이 필요했다. 탄압의 불길은 더욱 거세지면서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됐는데 추순옥·이윤일·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도 이곳에 은거하다 처형당했다. 한국 천주교 103명의 성인 중 한 사람인 황석두(1811~1866)의 고향도 이곳이기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연풍을 성지로 정하고 성역화 사업을 했다. 연풍초등학교 옆의 향청(鄕廳)을 매입해 이 일대를 신앙의 보금자리로 만든 것이다.

연풍향청은 조선시대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해 ‘유향소’라는 이름으로 설치한 곳이다. 1489년에 향청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 하에 운영되었던 자문기관이었다. 세월이 지나 경찰서 주재소 등으로 운영되다가 1963년 3월부터 천주교 연풍공소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가 연품현감으로 부임했다. 단원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리며, 무엇을 꿈꾸었을까. 수옥정폭포를 비롯해 연풍의 절경과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을 화폭에 담지 않았을까. 하늘과 땅, 자연과 사람들의 풍경을, 앙가슴 뛰는 마음을 그렸을 것이다.

이곳에는 닥나무를 재배하고 한지를 뜨는 신풍마을이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맑은 샘물과 오래된 나무와 돌담이 한유롭다. 우리나라 유일의 금속활자장 임인호 씨도 연풍에 거주하고 있다. 한지와 금속활자의 만남은 운명이다. 이 때문에 한국이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오래된 것은 모두 아름답다. 삶의 향기 가득하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동맥이다. 숲과 계곡과 마을의 풍경이 절경이다. 시루봉, 구왕봉, 은티마을을 잇는 산행길은 치유의 길이다. 30m 높이의 수직절벽에서 쏟아지는 수옥정폭포의 풍경이 짜릿하다. 젊은 남녀들은 절벽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쏟아지는 폭포의 내밀함을 즐긴다. 햇살이 물살과 함께 합궁을 하더니 눈부시게 부서진다. 

하늘 볕 가득한 연풍에서 봇짐을 풀자. 현청과 향교의 역사속으로, 한지와 공예의 문화속으로, 천주교성지의 마음속으로, 오래된 골목길과 느티나무의 풍경속으로, 맑고 푸른 산과 들과 가을빛이 쏟아지는 자연속으로 자박자박 걸어가자.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자. 가을엔 비우고 채우며 젖는 것이다. 하하늘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오방색 물감질로 내 마음 속 깊이 스며들더니 숲의 가장자리가 바스락거리며 애를 태운다. 들녘은 황금빛 물결 출렁이고 논길 밭길을 거닐던 농부의 주머니가 풍년이더니 텅 빈 대지에 마지막 남은 구절초 향이 햇살에 서걱거린다. 마른 억새 찬바람만 괜한 심술을 부린다.

가을엔 몸과 마음이 비옥한 내면의 시간이다. 지혜가 익고 삶이 성숙해지며 사사로운 것들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두리번거린다. 그러니 겨울이 오기 전에 허기진 마음에 군불을 지피자.


변광섭 청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로컬큐레이터, 에세이스트. 저서 『즐거운 소풍길』,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 『이 생명 다하도록』, 『불꽃의 시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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