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⑫ -청주시 내수읍 저곡리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⑫ -청주시 내수읍 저곡리
  • 변광섭
  • 승인 2021.04.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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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는 길, 고샅길에 피어나는 봄봄봄
사진=김영창
사진=김영창

고향으로 가는 길에 꽃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피어 있었다. 어떤 꽃은 연분홍 치마를 흔들며, 어떤 꽃은 붉은 입술을 내밀며, 어떤 꽃은 연지곤지 바르고, 어떤 꽃은 하얀 속살을 내밀며, 어떤 꽃은 어서 오라고 내게 손짓을 하며…. 모두 여린 입술을 내밀며 아련한 향기를 뿌리고 있었다. 겨우내 감추고 있던 뜨거운 연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숲과 들녘 사이로 주름진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세교리, 비중리, 비상리, 영하리, 우산리, 저곡리, 교자리!~. 어떤 마을은 녹슨 함석지붕과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 지붕이 아슬아슬했다. 오종종 예쁜 돌담도 있고 봄꽃으로 물감을 한 마을도 있었다. 낡고 빛바랬다. 누추하지만 그래서 삶이 더욱 곡진하게 다가오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일론 줄에 걸려 펄럭이는 빨래를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누구일까.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저들의 삶은 행복할까.

엘렌바스는 말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고향으로 가는 봄의 길목에서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생명에 대해 생각한다. 고향 집은 잡풀만 무성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늙은 팽나무만 하릴없이 집 앞에서 근본 없는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19세기 프랑스 도시문화를 상징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플라뇌르’다. 플라뇌르는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방랑하고 산책하는 사람이다. 시인이고 화가이며, 철학자이며 춤꾼이고 노래하는 방랑자가 아니던가. 고향으로 가는 길의 풍경에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이 부니 대지가 트림을 한다. 움트는 생명이다. 가슴이 뛴다. 

오늘은 저곡리 마을이 나그네 발목을 잡는다. 뒤로는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인 구녀산을 품고 있으며, 앞으로는 드넓은 논과 밭이 기름지다. 돌담과 농경의 문화가 깃든 곳이다. 저곡리는 1455년 청은(淸隱) 이건손 선생이 구녀산 자락인 이곳에 은둔하면서 마을이 생겼다. 청은 선생은 마을 입구에 회화나무를 한 그루 심고 자신의 청렴함과 올곧은 기개를 담았다고 한다. 회화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난다고 하여 ‘학자수’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 회화나무가 있다. 뒷산에는 닥나무가 많아 닥골 또는 저곡(楮谷)이라고 부른다. 마을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여러 개 있다. 그중의 하나,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를 품고 있는 샘물은 신기하고 신령스럽다. 마을 사람들은 그 샘물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고, 나무는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느티나무 샘물은 365일 쉬지 않고 물이 솟는다. 시원하고 달차근한 맛도 일품이다. 이 물을 마시고 피부병과 위장병 등을 치료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사진=김영창
사진=김영창

 

사진=김영창
사진=김영창

마을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100년 된 정미소가 있었다. 이 마을이 농경의 마을, 풍요의 고장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벼를 찧고, 쌀을 빻고, 떡을 빚었다. 발동기 소리, 벨트 소리, 농부들의 꿈이 영그는 소리가 가득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새들이 합창하는 소리는 얼마나 정겨웠던가. 그런데 방앗간이 세월의 풍상과 함께 낡고 쓰러졌다. 정미소는 철거됐지만 주요 시설물은 바로 옆 마을회관으로 옮겨졌다. 주민들의 문화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정미소카페’다. 정미소카페는 마을 주민들의 애장품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 풍구, 놋그릇, 검정 고무신…. 맑은 차 한 잔을 마시며 옛 생각에 젖는다.

이 마을은 돌담도 예쁘고 정겹다. 아랫집 윗집을 구분하기 위해서 만든 돌담이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할까.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적 상징체계다. 돌담의 돌들은 하나하나 그 모양이나 크기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조화롭다. 언덕이 많기 때문에 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 높은 돌담이 아니다. 낮고 느리며 여백의 미가 있다. 풍경이 되고 문화가 된다.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이 조화를 이루는 서정적인 메시지다.

이렇게 저곡리의 호젓한 길을 걸었다. 정미소카페에서 맑은 차 한 잔 마셨다. 개 짓는 소리, 산새 노래하는 소리, 봄 햇살 부서지는 소리가 무디어진 내 삶의 촉수를 깨운다. 마을 정산에서 굽어보는 평야는 또 얼마나 평화로웠던가. 내가 걸어 온 이 길이 헛되지 않으면 좋겠다. 꽃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그 꽃심이 자라 아픈 세상을 보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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