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⑱] - 청주 가덕면 계산리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⑱] - 청주 가덕면 계산리
  • 글=변광섭, 사진=김영창
  • 승인 2021.10.2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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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석탑과 말미장터, 민족혼 깃든 풍경
말미장터 마을 입구
말미장터 마을 입구

사위어가는 것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쓸쓸해 보인다. 마을은 푸르스름한 이내에 잠겨 허기지고 산촌은 적막한데 보름달만 고요한 밤을 지키고 있다. 쓸쓸하면 마음이 선해진다고 했던가. 모든 상처에는 풍경이 깃들어 있다. 그 무위한 풍경만으로 고단하고 질긴 삶의 물결이 출렁이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은 애달프지만 지나고 나면 이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애틋하며 그리움 가득하다.

어머니는 들판에서 진한 땀방울을 흘리고 돌아오면 마당과 부엌과 장독대를 서성거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당신의 마른 치마에서 먼지가 푸석거렸다.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인데 주저앉을 수 없다. 불현듯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리움이 간절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소나기가 기다려지고, 집을 떠나 도시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영혼을 깨우는 소리, 무디어진 촉수를 되살리는 소리를 찾아 나선다. 

말미장터 가는 길
말미장터 가는 길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계산리에 말미장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이 있는데 대한민국의 보물 제511호다. 기단(基壇)은 가운데 돌이 서로 엇갈려 짜였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다. 탑신(塔身)은 1층과 3층의 몸돌은 4장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2층과 4·5층의 몸돌은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지붕돌은 1·2층이 2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3층 이상은 한 돌이다. 지붕돌의 윗면(낙수면)은 경사가 심하며, 지붕돌 아래의 받침은 처마끝까지 나와 있어 둔중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히고 안정감이 있다. 전문가들은 위아래 지붕돌의 체감률이 정연하여 전체적인 안정감이 느껴지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이곳이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말미장터 마을 풍경은 자랑할만하다. 계산리 말미장터는 피반령 고개 아래에 있는 아늑하고 청정한 마을이다. 옛날에 큰 산 아래 장이 섰다고 해서 말미장터라는 지명이 생겼다. 피반령의 험준한 고개를 넘나들던 고단한 삶이 녹아있는 마을이다. 산과 계곡과 논과 밭 모두 때묻지 않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도룡농, 버들치, 민물새우, 계곡다슬기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이 일대를 농업치유공간, 유기농 특화공간으로 잘 가꾸어야겠다.

피반령에서 내려온 물은 말미장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피반령에서 내려온 물은 말미장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가덕면 일대는 그 역사만큼이나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쓴 분들이 많다. 3·1운동 민족대표로서 약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신홍식. 부흥사 출신의 감리교 목회자이기도 한 그는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전했으며, 사회계몽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규식과 신건식 형제도 평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형제는 상하이로 망명해 동제사, 대동보국단 등의 단체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형 규식은 대동단결 선언에 참여했고 대동보국단을 조직했으며 신한혁명단을 결성했다.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동생 건식은 1923년 중국군 중교(中校)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에, 1943년에는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계산리 5층석탑
계산리 5층석탑

신건식의 딸 신순호는 여성 독립운동가다. 어머니와 함께 상해로 이동,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와 함께 고난의 유랑길을 함께했다. 1938년 임시정부가 류저우 시기에 창립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군 때 여군으로 입대해 총사령부에 근무했다. 해방 후에도 한인 동포 귀국 문제 처리를 위한 주화대표단 임무를 맡았고 고향의 가덕중학교에 사재로 ‘삼강도서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독립운동 명문가의 혈통을 이은 전사가 아니던가.

계산리 말미장터로 가는 길은 더디고 느렸다. 피반령 고개의 단풍이 나그네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마을은 온통 가을볕으로 가득했다. 수확이 끝난 논과 밭을 바라보니 어머니의 마른 치마에서 먼지 푸석이던 그날의 풍경이 스쳤다. 아, 나의 조국, 나의 대지여. 외마디 비명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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