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부딪쳐라, 뒤돌아보지 마라
[권희돈 교수의 치유 인문학] 부딪쳐라, 뒤돌아보지 마라
  • 권희돈 교수
  • 승인 2022.12.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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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이클릭아트
사진=아이클릭아트

 

내일이면 50년 동안 끼고 살던 삼천여 권의 책과 헤어져야 한다. 제자가 재직 중인 대학도서관에 기증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후학들의 배움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뿌듯하였지만, 기증일이 가까워올수록 온갖 감정이 일렁거렸다. 

평펑 쏟아지는 눈(雪)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때는 하얀 눈송이처럼 책이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일을 떠올렸다가, 눈이 저렇게 쌓이면 내일 책 가지러 오는 트럭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가, 눈아, 목화송이 같은 눈아, 사뭇 쏟아져서 길이란 길 모두 지우거라 체념한 듯 넋두리를 하다가. 그러다가 번뜩 눈을 치워야지 그래야 트럭을 현관문 앞에 세울 수 있지.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니, 현실에 맞는 행동은 눈을 치우는 일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눈이 그쳤다. 족히 10cm 정도는 쌓였다. 동쪽 먼 산 위의 구름이 걷혔다. 구름 낀 내 마음도 걷히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서서 지하주차장에 가 보았다. 큼지막한 넉가래 하며 청소용구들이 놓여있었다. 넉가래 하나를 들고 나와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비탈진 언덕의 눈을 길가로 쓸어 버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한 청년이 현관 입구 쪽에서 눈을 치우고 있다. 다가가서 통성명을 하고 사는 집 호수를 물어보고 다시 각자의 넉가래를 잡았다. 드르륵 소리가 위아래에서 들리니까 잘 맞는 이중창처럼 화음이 그럴 듯하였다. 함께 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없던 힘이 절로 솟아났다. 정신도 맑아졌다. 눈 속에 파묻혔던 길의 윤곽이 들어났다. 

불현듯 구석진 곳 전신주 밑에 노란 플라스틱 통이 보였다. 뚜껑을 열어보았다. 세상에, 누군가 갖다놓았을까? 염화칼슘 한 부대가 놓여 있었다. 이제 다시 눈이 내려도 걱정이 없겠다 싶으니까 든든한 느낌이다. 나는 청년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청년도 따라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렇구나, 망설이지 말고 부딪쳐보는 것이로구나! 안 될 것 같은 일도 미리 걱정하지 말고    일단 부딪쳐보는 것이로구나! 혹여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의 값을 치르며 성공의 길을 걷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실패는 절반의 성공이라 하는 구나!”

서재로 돌아와 책과 리딩카드 등등을 가만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가 남기고 싶은 책 하나만 뽑아내자 생각하고 이것저것 뽑았다 꽂았다 하기를 얼마간 반복하다가, 마침내 하나를 다시 뽑은 것이 「수용미학」이었다. 그것은 내가 석, 박사 과정 때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공부하던 독자 중심의 문학 이론서였다. 갈피갈피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고 활자의 행간에 빼곡히  메모해 놓은 내 혼(魂)이 담긴 서적이었다.

해가 저물어 사물의 빛깔들이 진회색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확연하게 냉정하게 시간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물들이 빛을 받던 때는 벌써 과거로 물러갔다. 문득 내가 뽑은 한 권의 책도 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삼천여 권의 책속에 끼워 넣었다. 
옛이야기에 상투적으로 나오는 금기어 ‘뒤돌아보지 말라’는 구절이 연상되었다. 

“과거는 지나갔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해 하지 마라. 과거는 이미 완료형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난 일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

뒤돌아보지 말라는 의미를 이제서야 깨닫다니? 아! 나의 이 아둔함이여! 어리석음이여! 

그러나 한 편으로는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어둠이 밤의 평안을 몰고 오듯이 내 마음도 평안해졌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현관 문 앞엔 이미 대학 도서관 사서 선생이 학생 다섯 명 그리고 트럭 기사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 책 기증하시는데 어떤 조건이 있으신가요?’ 벌써 두 번째 듣는 말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없습니다.’ 쿨하게 답했다.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첫 번째 학생은 박스에 테잎을 붙이고, 두 번째 학생은 책을 빼서 세 번째 학생에게 넘겨주고, 세 번째 학생은 박스에 넣고, 네 번째 다섯 번째 학생은 트럭에 나르고, 기사 분은 트럭에 책상자를 차곡차곡 쌓는다. 분업으로 하는 일인데 손발이 척척 맞아 보기가 좋았다. 두 시간 만에 작업이 끝났다.

텅 빈 책꽂이를 보니 시집간 딸의 방을 보는 듯 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싸한 마음도 잠시 고요한 침묵이 내 온 몸을 감싼다. 내 삶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내 몸도 덩달아 가벼워져서 새처럼 날고 싶어졌다.(時雨) 

권희돈 교수
권희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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