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석산 교수 "유전자에는 문화가 없다"
탁석산 교수 "유전자에는 문화가 없다"
  • 정준규 기자
  • 승인 2016.04.08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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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세종도서관 · KDI 공동주관 '경제로 보는 세상'

[세종경제뉴스 정준규기자] 국립세종도서관과 한국개발연구원(KDI)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경제로 보는 세상' 첫 강좌가 지난 5일 국립세종도서관 대회의실에 열렸다. 첫 강연자로 <한국의 정체성>,<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저자이자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 중인 인문학자 탁석산 교수가 선정됐다. '한국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라는 주제로 펼쳐진 탁석산 교수의 강연을 정리했다.

유전자에는 문화가 없다

▲ 인문학자 탁석산 교수. /김승환 기자

 과학이 인문학에 영향을 끼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 유전자를 통해 한국인의 기원을 밝히고 더 나아가 한국문화의 특질도 설명할 수 있다는 움직임이 있다. 즉 현대과학의 총아로 각광받는 유전자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는 믿음이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단행본으로 외롭게 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한국문화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유전자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기원도 한국문화의 특성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한류 역시 ‘한류 DNA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이 전통적으로 보트카를 많이 즐기는 이유가 칭기즈칸에 의해 형성된 몽골인의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거나, 세계 최고의 장수 민족인 일본의 오끼나와인이 체외에서 침투하는 병원체를 막아주는 면역기능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유전학적으로 매우 구미가 당기는 얘기다.

한국문화의 기원을 밝히려는 욕망

 유전자를 통해 한국인의 기원이나 한국문화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이선복(李鮮複)은 매우 논리적으로 논파하고 있다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결정적 논박이기에 그대로 옮긴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증거는 그 자체만으로는 한국이건 어느 다른 집단이건 주어진 집단의 기원을 밝혀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음에 유념해야 한다. 특정 집단이 모종의 유전적,형질적 특징을 지니게 된 과정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설령 그런 과정을 밝힐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집단의 생물학적 특징의 변화는 이루 다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령 한국인의 생물학적 특징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밝힐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한국인의 기원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신체적 특성에서 이해할 수 있는 주민집단의 생물학적 특징은 집단의 언어적,문화적 혹은 역사적 특징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5일 국립세종도서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경제로 보는 세상' 강좌에서 탁석산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은 무엇일까'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김승환 기자

문화는 학습되는 것,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 

 한국의 문화적 특성으로 흔히 거론되는 몇가지를 들어보자. 집단주의,가부장제,권위주의,배타성,평등주의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지금 한국의 문화적 특성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동시에 원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고 일제의 지배와 전쟁, 그리고 독재 하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굴절된 것이라고 항변한다. 따라서 원래의 우리의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지금 우리 문화의 부정적 부분은 남의 탓이기 때문에 노력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자세가 바람직한가? 부정적 요인을 제거해야한다는 것은 당연히 옳은 말이지만 우리의 전통이라고 일컫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묻고 싶다. 이런 자세에는 전통에 대한 숭상과 고전적 가치에 대한 경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는 문화를 자연적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흔히 문화는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한다. 물론 높은 수준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파된다는 취지로 옳은 말이지만, 자연스럽다는 말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문화의 학습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탁석산 교수 / 김승환 기자

 

 문화는 생각만큼 자연스럽게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가 학습되는 것이라면 누군가, 아니면 어떤 집단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학습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문화가 학습되는 것이라면 누군가를 의식적으로 학습시키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학습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것도 있지만 보통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가르치고 누군가는 배운다.

 

삶의 모든 것을 바꾸는 문화변동 

 한국문화를 탐구하자면 여태껏 한국인이란 하드웨어 위에 얹혔던 프로그램을 찾아내고,또 지금 얹힌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면 될 것이다. 문화가 변화는 것이라면 몇 년의 역사를 갖는 한국은 적어도 몇차례에 걸쳐 프로그램이 바뀌지 않았을까. 바뀌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한국문화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에 착수하기에 앞서 우리는 문화가 집단의 학습된 프로그램으로 유전된 것이 아니고 집단에 한정된 것이며 보편적 인간성이나 개인의 성격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고, 또한 문화가 학습된 것이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개인이든 집단이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학습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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