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캐럴, 벚꽃엔딩

2018-03-20     이재표 기자

12‧12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광장으로 끌어낸다. ‘민족문화와 국학’을 내세운 관제행사의 이름은 ‘국풍81’이었다. 국풍81에서 곱슬머리의 대학생이 ‘바람이려오’를 불러 가요제 금상을 받았다. 그가 바로 1년 뒤 신곡 ‘잊혀진 계절’ 하나로 가수왕에 오른 ‘이용’ 씨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되는 ‘잊혀진 계절’은 ‘조용필=가수왕’이라는 공식을 깨뜨렸다. 그로부터 36년,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이라는 노랫말처럼 해마다 돌아오는 시월이면 노래 ‘잊혀진 계절’이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온다.

그런데 ‘잊혀진 계절’보다 더 끈질긴 생명력이 예상되는 노래가 있다. ‘장범준’이라는 가수가 부른 ‘벚꽃엔딩’이다. 예전처럼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고 가요순위 프로그램이나 연말 ‘가수왕’이 사라진 터라 ‘장범준이 누구고, 벚꽃엔딩은 또 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장범준이라는 가수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라는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얘기하면 “아하, 그 노래”하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 웬만한 이들은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은 몰라도 감미로운 선율과 속살대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으리라.

올해도 벚꽃엔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벚꽃이 피기 전부터 꽃잎이 다 흩날린 뒤에도, 벚꽃이 피고 지는 기별을 이 노래를 통해 듣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는 한 이 봄, 이 노래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런데 이 노래를 막상 불러보자니 가사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가사를 꼬치꼬치 새겨들은 것이 아니라 그림을 감상하듯 공감각으로 음미해왔을 뿐이다. “봄바람 휘날리며~”로 시작하는 후렴부도 그 한 소절만 정확히 떠오를 뿐 그저 콧노래로 허밍 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다 가사를 꼼꼼히 뜯어보니 한 소절, 한 소절이 ‘비문(非文)’이다. 봄바람은 휘날릴 수가 없다. 봄바람은 옷자락, 또는 머리칼 등을 날리게 만들 뿐이다. 더군다나 ‘날리’라는 어근에 ‘휘’라는 접두사가 붙는다면 최소한 ‘태극기’ 정도는 휘날려야 할 것 같다. 내가 가사를 썼다면 “봄바람 살랑대는”이 됐을 것이다.

그 다음 소절은 “벚꽃잎이 울려 퍼질”인데 이 또한 비문이다. 벚꽃잎이 울려 퍼진다고? 울려 퍼지는 것은 반드시 소리여야 한다. 이쯤 생각하다가 문득 허망해진다. 대학생활 초반까지 시인이 되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살다가, 쓰긴 쓰는 직업인데 기자가 되어 22년째 메마른 글을 쓰면서 갖게 된 ‘딱딱한 사고’에 갇힌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다. 김광균의 시 <외인촌>의 그 유명한 한 줄,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청각의 시각화, 즉 공감각화다. 벚꽃잎이 울려 퍼진다는 것은 반대로 시각을 청각으로 바꾼 것이다. 더욱이 벚꽃엔딩은 대중가요다. 중요한 것은 문법적 완성이 아니라 대중적 공감이다.

장범준이 2012년 벚꽃엔딩을 발표한 이후 5년 동안 받은 저작권 수입은 약 6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저작권 문제 때문에 거리에서 크리스마스에 캐럴이 사라졌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지적재산권은 강화됐다. 벚꽃엔딩을 ‘봄의 캐럴’로 만든 것은 장범준의 감수성이지 결코 국어실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