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년 역사 품은 ‘덕촌신협’
반백년 역사 품은 ‘덕촌신협’
  • 이주현 기자
  • 승인 2017.02.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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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교회 주도 운영… 2년 뒤 청주시 최초 발족
옥산면 덕촌‧신촌‧환희리 등 3개 지역 조합원들만 활동
조합원 수 1514명, 총자산 147억 6000여만 원
초창기 덕촌신협의 모습. / 사진제공=덕촌신협.

[세종경제뉴스 이주현기자] ‘알뜰히 살뜰히 모은 푼돈은 / 강물이 불어나듯 불어나간다 / 희망의 무지개로 다리를 놓아 / 오붓한 살림살이 즐거운 인생 / 신용조합 우산 아래 구수한 사랑 / 서로 믿고 서로 도와 친형제 같이….’

수필가이자 원로 농학자인 고(故) 류달영(1911~2004) 씨가 작사한 ‘신용협동조합의 노래’에는 함께 한다면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묻어있다.

1970년 초에는 자조와 자립, 협동 정신이 농촌 곳곳에 들불처럼 번졌다. 1950년대 전후 복구를 위한 유엔의 활동,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등이 구제나 보조를 위한 단순 지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면서 협동조합운동이 생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검과 절약, 저축과 협동의 성격을 띤 신협은 국민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초창기 덕촌신협의 모습. / 사진제공=덕촌신협.

1972년 8월 17일. 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조직됐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서는 1962년부터 민간 주도의 운동으로 육성되고 있었다. 청주시에서는 덕촌신협이 1968년 1월 19일자로 처음 세워졌다.

2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소재 덕촌신협에서 만난 박흠직(65) 이사장과 정근래(58) 상무는 “발족은 1968년 1월 19일인데, 2년 전 덕촌교회에 새가정회의 어린이저축운동이 효시가 돼 신용협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며 “새가정회는 교회 제직이 아닌 소우 정예화된 젊은 세대들의 모임이었다”고 말했다.

박흠직 덕촌신협 이사장. / 박상철 기자

초반에는 특별한 공간이 없었다. 교회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남는 사무실이나 교육관 등에서 업무를 봤다. 형편이 나아지면서 독립 건물을 소유하며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발족 당시 초대 이사장인 정방래 씨를 주축으로 조합원 39명이 자산금 1만 4183원을 걷어 출범했다. 이때 김창경 덕촌교회 전도사와 박종갑 YMCA 옥산지회장, 박승만 부회장, 정만호 총무, 최진택 이사 등 마을 선구적 지도자 역할을 하며 계몽 운동을 벌였다.

당시 덕촌 1~2구 부락의 총 가구 수는 220호였다. 이 중 160호가 가입했으며, 주민의 80%가 조합원으로 활동했다. 이 중 50%가 덕촌교회 교인이었다. 1970년대 다른 농촌교회는 재정난에 허덕였지만, 덕촌교회는 꽤나 넉넉했다. 신용협동조합에서 40만 원의 건축비를 연 2%의 싼 이자로 대부를 받아 25평의 구 건물을 헐고 42평의 석조 건물로 새 옷을 입을 수 있었다.

1971년 11월 8일에는 저축을 열심히 하는 조합원을 뽑아 상을 주기도 했다. 최초의 모범 조합원상의 주인공은 진하종(여‧당시 37세) 씨였다.

진 씨의 인생은 역경의 반복이었다. 당시 슬하에 5남매를 두고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갑작스럽게 병에 걸렸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진 씨는 슬펐지만 주저앉을 수 없었다. 자신만 바라보는 5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 생전 팔자에도 없던 농사일을 시작하게 됐다. 16살 된 큰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셋째 장녀까지 논밭으로 끌고 다니며 농사일에 여념이 없었다.

한 때 여름에는 참외농사를 지었다. 진 씨는 참외가 든 광주리를 이고 큰아들은 지게에 한 짐을 실었다. 새벽 첫닭이 울면 일어나 자녀들과 조치원 시장에 나가 하루하루 생계비를 벌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른 일이 없었다. 이렇게 번 돈은 악착같이 덕촌신협에 저축했다.

1972년 신협법이 공식 제정되면서 덕촌교회에만 국한됐던 공동유대를 인근 지역으로 확대했다. 이때 조합원의 땀방울로 13평 남짓한 자체회관도 지었다.

덕촌신협은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1억 원 규모의 완두콩을 공동출하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농촌조합인 덕촌신협은 완두재배와 단무지 생산으로 유명하다.

덕촌신협 직원들이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박상철 기자

현재는 옥산면 덕촌‧신촌‧환희리 등 3개 지역의 조합원들만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기준 조합원 수는 1514명이며, 총자산은 147억 6000여만 원이다.

박흠직 이사장은 “덕촌신협은 가난한 농촌의 부흥과 농촌 목회의 한 방안이자 자조, 자립의 정신을 잘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부락과 교회 발전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며 “옥산면사무소나 옛 청원군청은 물론 농협까지도 이 지역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덕촌신협을 먼저 찾아와 상의하고 협조를 구했었다”고 설명했다.

정근래 덕촌신협 상무. / 박상철 기자

정근래 상무는 “옆집에 뭐가 있는지 알정도로 회원들 간 신뢰와 유대가 좋다”며 “회원들도 덕촌신협이라 부르지 않고 ‘우리신협’이라 부른다. 그만큼 가족애가 있는 조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덕촌신협의 재정성은 여전히 건재하며, 아버지 세대 때부터 이어온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충북에는 127곳의 신협이 있다. 경기(216곳), 서울(144곳)에 이어 3번째로 많다. 총자산은 4조 9242억 원이며 41만 7000여 명의 조합원이 활동하고 있다. 청주시에는 절반이 넘는 68곳이 몰려있다. 청주에서 자산이 가장 많은 곳은 남청주신협으로 지난해 기준 2741억 원이며, 조합원 수는 1만 5000여 명이다.

*신용협동조합 HISTORY

- 특별법인 신용협동조합법에 의해 조직 운영하는 단체. 역사적으로 보면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일어났다. 유재기, 배민수 목사 등이 기독교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소비조합, 신용협동조합을 도청에 조직했다. 이들은 ‘한 교회, 한 조합 설립’의 운동을 펼치며 농민들을 각성시키고 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충북에서는 1952년 기독교 협동조합이 창립됐다. 김종호 장로의 주선으로 총 자산 500만 원이 모여졌다. 이 중 95%는 기독교인이 출자해 기독교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이곳에서는 재정난으로 경영이 부진했던 충북제도사를 다시 복구해 도자기를 생산했다.

초창기 덕촌신협의 모습. / 사진제공=덕촌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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