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직장 공무원을 퇴직한 변호사
꿈의 직장 공무원을 퇴직한 변호사
  • 박상철 기자
  • 승인 2017.04.05 16: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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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진학, 공무원 시험 합격, 변호사 시험 합격 3관왕 이뤄
남보다 늦은 시작, 늦은 승진이라도 확고한 방향만 있다면 OK

별난 변호사를 찾아서②-이민규

남들이 부러워할 합격을 세 번이나 이룬 이가 있다. 법률법인 명장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이민규 씨가 그 주인공이다. 명문대 합격, 공무원 시험 합격, 변호사 시험 합격. 이 세 가지 합격증을 가진 이가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될까? 부러운 이력을 자랑하는 그의 별난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두가 잠든 새벽 4시.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중2 꼭두새벽부터 신문 배달 일을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힘차게 폐달을 굴렸지만 한 달 수익은 고작 3~4만원 남짓. 그렇다고 그만 둘 수 없었다. 두 시간의 배달을 마치면 곧바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3년간 이어온 이 생활에 몸과 마음은 지쳤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건 어린 중학생이 감당하기엔 벅찼다.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정했다. 대학교수, 공무원, 변호사로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언뜻 봐도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중학교 때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관심이 많았던 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적을 품에 안고 살았다. 그때의 독서가 그의 방향 설정에 많이 도움이 됐다.

친형이 졸업했기에 익숙했던 가까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벽문학회’라는 지금의 문학 동아리 활동을 우연찮게 시작했다. 평소 홀로 감정을 삭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시(詩)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의 매력에 빠졌다. 특히 같은 동아리 소속 선배들과 학업이나 집안, 문학 등의 교류를 통해 위로가 됐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고3때는 학생회장까지 맡으면서 ‘엄친아’가 아닌 ‘다른 엄마들이 부러워하는 아들’로 주위 부러움을 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소재 명문대에 당당히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교수를 꿈꿨다. 하지만 경제적 벽이 막아섰다. 학사 졸업 후에도 석사 2년 외국유학 6년의 길을 걸어야 했던 교수의 길은 험난했다. 꿈보다는 현실의 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꿈꿨던 세 가지 꿈 중 교수의 꿈은 아쉽지만 포기했다.

곧 의경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특히, 유치장에서 6개월 근무가 가장 기억이 남는다. 산더미처럼 쌓은 사건기록들이 눈을 자극했다. 평소 접할 수 없는 생소 기록에 힐끗힐끗 곁눈질로 살피느라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다양한 사건들이 기록되었지만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처음에는 사건이 보였지만, 나중에는 사람이 보였다. 이때 꿈꿨던 꿈은 다시 한 번 또렷해졌다. 이 당시의 궁금증이 제대 후 공무원을 하며 변호사를 병행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큰 시련이 찾아왔다. 제대 직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버팀목이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됐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목표한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염치불구 가족들에게 마지막 1년 지원을 부탁했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탈락’의 쓰디쓴 문자였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도전한 9급 공무원시험. 노력은 배반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벼랑 끝에서 9급 공무원 시험에 최종합격했다. 고향에서 공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과 이제는 가족들에게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감사했다. 2009년 1월 공무원으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첫 수습발령은 청주시청 기획예산과였다. 이후 흥덕구청 주민지원과로 정규발령 됐다. 생활은 안정을 찾았다. 어깨를 짓누르면 대출금도 틈틈이 갚아나갔다. 업무적으로 직접 시민들을 만나 그들의 문제점에 행정적으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이 좋았다. 민원인들의 ‘고생했다’, ‘고맙다’란 말한 마디에 많은 보람을 느꼈다. 특히, 어머니의 한층 밝아진 얼굴을 볼 때마다 한 없이 감사했다. 안정된 생활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마지막 꿈인 변호사가 눈에 밟혔다.

공무원으로서 계속 남아있으면서 변호사가 되어 일해보고 싶었기에, 시청 인사계에 법학전문대학원 교육과정을 병행할 수 있는지 문의해보았지만, 답변은 “어렵습니다.”였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안하고 후회하기보다 해보고 후회하자는 생각으로 변호사 도전을 외쳤다. 가족과 주위 반대가 거셌다. 안정된 생활을 뒤로한 채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그의 도전은 누가 봐도 말릴 상황이었다. 결국 2012년 3월 공무원을 퇴직하고 그 동안 모아둔 돈으로 이듬해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대학교 때는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했지만 대학원에서는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에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단순 직업을 쟁취하기 위한 도전이 아니라 변호사로서의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 동기가 확고했던 탓에 남들보다 늦은 도전이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변호사가 되겠다는 결심 후 3년 만인 2016년 4월 변호사 시험에 최종합격하면서 마지막 꿈을 이뤘다.

현재는 법무법인 ‘명장’에서 변호사로 근무 중이다. 공무원 때보다 일의 업무량은 많아졌지만 지금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그의 적성에 맞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소송을 어떻게 진행할지, 법리적으로 어떻게 다툴지, 의뢰인들과 상담하고 최종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직업 특성상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난다. 그들과 소통 속에서 풍부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직업에 만족한다.

늦깎이 변호사로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정한 ‘방향’은 확고했고 정확했다. 공무원로서 할 수 있는 일,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 "단순 이 직업이 하고 싶어서 택한 것이 아니에요. 많은 시험에 떨어져도 주위 친구들보다 승진이 느려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고자 하는 방향이 틀리지 않아서죠." 변호사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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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2017-04-05 20:29:01
시련을 이겨낸 진솔한 인터뷰가 좋습니다.
기자님이 잘 이끌어 내신거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