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서 박수갈채 받을 때 가장 행복해”
“무대서 박수갈채 받을 때 가장 행복해”
  • 박상철 기자
  • 승인 2017.04.17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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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의 본고장 '이태리'서 만난 스승, 지금의 그를 있게 하다
오페라, 연극 등 지금까지 공연 1000여 회 이상 활발한 활동
오페라 사랑의 묘약中 벨꼬레 역을 맞아 공연을 하는 모습 / 사진=장관석

바리톤 장관석

어릴 때부터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던 이가 있었다. ‘예술은 배고프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권유로 미대 진학 보다는 평소 남들보다 잘 부르던 노래를 택했다. 1986년 청주사범대(현 서원대) 음악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 성악을 공부해 입시를 준비해야 했기에 학업보다는 노래 연습을 많이 했다. 그래서 장관석(51세)교수는 대학에 진학한 뒤 학업에 소홀하지 않고 4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교육학과다 보니 주위에서 선생님이 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장 교수는 노래에 꿈이 있었고 노래가 좋았다. 용돈의 여유가 생기면 대가(大家)들의 레코드판을 구입해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 문득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악 전공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대학 졸업 후 대전시립합창단 상임으로 들어가 안정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유학이 눈에 밟혔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0년 당시 24세의 어린 나이. 움부리아주 빼루지아 언어학교에 입학해 언어를 배우고 중간중간 레슨도 받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이후 한국의 고등음악원이라 할 수 있는 ‘부르노마데르나’ 국립음악원에 합격했다. 이탈리아 교육시스템은 ‘쁘리바따’기간이라고 해서 처음에 학년을 배정받지 않는다. 1년을 다닌 후 평가해 학년을 정하는 시스템인데 장 교수는 4학년 시험을 봐 1년 만에 4학년으로 배정을 받았다. 이후 믿고 따르던 스승인 '롯시니' 국립음악원으로 전근을 가면서 장 교수도 그 학교로 적을 옮겼다.

‘롯시니’ 국립음악원을 졸업 후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을 만난다. ‘조르조따데오’ 그 이름만 들어도 지금도 벅찬 감동을 느낀다. 조르조를 만나 성악의 기초를 탄탄하게 닦을 수 있었다. 이후 바리톤의 곡과 음역 등을 가르쳐준 ‘삐에로까푸칠리’, ‘알도프로티’ 이 두명의 바리톤 스승을 만나면서 성악가로서의 꿈을 차근차근 이뤄갔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치는 장 교수 / 사진=장관석

1995년 장 교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다. 처음으로 국제성악콩쿨인 제2회 빈첸초노스트로 콩쿨에서 2위로 입상을 한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받은 첫 상이라 그때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수상의 기쁨도 잠시. 한국에서 생활비를 지원이 더 이상 어렵다는 부모님의 연락을 받게 된다. 게다가 이렇다 할 이탈리아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지 못한 상황의 장 교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우연찮게 한국에서 여행온 지인의 도움으로 약간의 돈이 생기자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조르조를 찾아가 레슨을 다시받기 시작했다. 배우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그 순간 가장 마음이 편했다. 4개월간의 레슨을 마친 후 어려운 그의 상황을 알게 된 조르조는 레슨비를 고스란히 다시 돌려줬다. 따뜻한 선생님의 배려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되새긴 채 아쉽지만 1996년 1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장 교수는 더욱 바쁘게 살았다. ‘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한 그는 매년 1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방분서주 뛰어다녔다. 지금까지 약 1000여 회 이상의 오페라와 연주를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1999년 개인적인 사정으로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지친 몸과 마음을 술로 달랬다. 그러다 성악가의 생명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절망하고 좌절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8개월 간 라면만 먹으며 생활했다.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지듯 아팠다. 어머니가 그에게 제안했다. “한 달이라도 이탈리아 다녀오는 건 어떠니?”라며 300만원으로 쥐어주셨다. 바로 이탈리아로 향한 그는 인생의 스승인 조르조를 찾았다. 선생님의 조언 속에서 다시 발성 연습을 한 결과 한 달 만에 잃었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장 교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삶의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바리톤 장관석 교수 / 사진=장관석

“당시 진짜 절망적이었어요. 물론 이유는 내가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였죠. 힘들다고 노력과 연습을 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 가장 컸어요. 그날 이후로 깨우치고 항상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 뒤 두 배, 세 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귀국한 뒤 요청 들어오는 연주는 다 했다. 일에 미쳤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 뛰어다녔다. 97년부터 서원대 교수로 강의도 맡으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2008년 2월 정말 마음 아픈 비보를 듣게 된다. 정신적 지주며 스승인 조르조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소식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한다. 지금의 장 교수가 있기 까지 물신양면 도움을 줬던 선생님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다짐했다.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내가 받았던 사랑을 똑같이 전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장 교수는 무대서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리의 길을 중요하다고 말이죠. 소리는 내는 것이 아니라 울리는 것이다”고 신신당부한다.

“앞으로 저는 소극장을 만들어 '연극적인 오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보다 객석과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이 쉽게 이해하고 소수의 음악이 아닌 대중적 음악을 하고 싶은 것이 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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