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여 년, 내 삶의 동반자 '색소폰'
삼십여 년, 내 삶의 동반자 '색소폰'
  • 박상철 기자
  • 승인 2017.05.15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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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다양한 악기 다루며 폭넓은 음악적 소양 키워
밤무대 거쳐 방송에서 활약...색소폰 하나로 전성기 누려
지도자 · 연주자로 활동한 활동 펼치며 색소폰 선율 선사
사진=안태건

32년간 한 악기 색소폰만을 연주했다. 색소폰이 사람의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라고 말하는 안태건 충청대 실용음악과 교수. 오늘도 소리의 떨림이 시작되는 마우스피스에 대나무를 종잇장처럼 깎아서 만든 ‘리드’(관악기의 발음원이 되는 얇은 진동판) 속으로 힘차게 공기를 불어 넣는다. 수십 년 간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색소폰 소리는 듣는 이에게 다양한 색소폰 선율을 선사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고적대’에서 작은 북을 도맡으며, 음악적 소질을 키웠다. 특히, 집안 한 구석 수북한 먼지에 쌓인 기타는 늘 그의 놀잇감이었다. 당시 접하기 쉽지 않은 기타를 고사리 손으로 치면서 점점 음악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 뿐이랴 합창부에 들어가서도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음악적 소양을 닦았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학교 강당에서 펼쳐진 당시 교내 밴드부의 화려한 축하공연을 보면서 느낀 가슴 떨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당시 솔직히 말하면 트럼펫이나 트럼본 같은 남자다운 악기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관악부 빈자리가 색소폰 밖에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색소폰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네요(웃음)”라며 그날을 회상하며 미소 지었다.

1980년 중반 당시 그룹사운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관악부 활동을 하면서도 방과 후 교내 그룹사운드인 ‘소나기’에서 드러머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학창시절은 그에게 다양한 악기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런 경험 하나 하나가 모여 그를 성장시켰다. 특히 색소폰 연주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다.

1988년 그는 고교졸업과 함께 색소폰학과에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 전국에 색소폰학과는 전무했다. 곧바로 서울로 상경한 그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품을 팔았다. 제일 자신있는 색소폰으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방팔방 명함을 돌리고 돌렸다. 3개월이 지났을까? ‘1번지 스탠드바’ 밤무대에서 첫 일을 시작했다.

사진=안태건

당시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거품호황이 극에 달하던 때라 모든 술집은 새벽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노래방도 많이 보급이 안 되었던 터라 즉석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스탠드바의 인기는 가히 대단했다. 웬만한 직장인을 능가하는 월급을 받으며, 주가를 날렸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달래듯 전해지는 색소폰 소리에 손님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3년간의 밤무대 생활은 값진 경험으로 그를 색소폰의 매력에 풍덩 빠트려버렸다.

1992년 제대와 함께 그는 당시 롯데월드 지하에 있던 나이트클럽 ‘허리우드’에서 그룹사운드 ‘프리’의 구성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군대에서 군악대로 활동하면서 악기를 손에 놓지 않아선 지 2년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연주는 완벽했고 손님들의 심금을 울렸다. 색소폰과 건반 주자를 맡아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대규모 카바레는 12~15명으로 구성된 전문 악단을 꾸렸다. 방송국 단원들이 부업을 뛸 정도로 연주의 수준은 높았다. 그래서 A밴드는 악단이라고 부르고, B밴드는 그룹사운드라 부르며 붐을 일으켰다. 안 교수는 A밴드에서 활약을 하면서 1997년에는 방송계까지 진출하게 된다. KBS의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연주자로 일할 천금 같은 기회를 잡게 됐다. 당시는 MR(녹음된 반주), AR(립싱크)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고, 그는 그 무대에서 색소폰을 독주하는 기회도 잡으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최고를 달리던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이제 단순히 연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색소폰 연주자 케니 지(Kenny G)처럼 직접 자신의 곡을 써서 연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2002년 서원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입학했다. 작곡법, 편곡법, 화성학, 컴퓨터 음악 등 부족했던 음악적 이론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도 동대학원 음악교육학을 전공하면서 지금의 후학양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현재 그는 충청대 실용음악과 교수와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하면서 후학양성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원대 평생교육원, (사)한국연예예술인협회 연주위원회 위원장, 청주 직지팝스오케스트라, CJB교향악단 등 많은 공연활동도 펼치면서 지역민들에게 좋은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안 교수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색소폰하면 저속하고 음지의 악기로 많이들 생각한다. 세월이 많이 지나 지금은 인식이 많이 좋아져서 일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가 됐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딴따라는 이름표가 따라다닌다. 제가 30년 넘게 색소폰을 연주하면서 모든 감정 표현이 가능하고, 어떠한 음악 장르에 접목 가능한 악기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내어놔도 뒤처지지 않는 좋은 악기다. 이런 색소폰의 좋은 이미지를 더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색소폰과 함께한 32년의 삶. 이제는 색소폰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 정도로 전문가가 됐다. 어떤 장르에도 구애받지 않고 표현이 가능한 색소폰으로 지도자로서 때론 연주자로서 어떠한 감동을 선사할지 기대해본다.

사진=안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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