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의 ‘왕의 남자’…내시 김처선
세종시의 ‘왕의 남자’…내시 김처선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7.09.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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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부터 다섯 임금 모셔…연산군에게 직언하다 처형
전의현 행정구역서 없애고 모든 문서에서 처(處) 지워

우리 고장 알쓸신잡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으로 분한 정진영과 김처선 역의 장항선. 사진=다음 영화

2005년 개봉해 1051만명을 동원한 ‘왕의 남자(이준익 감독)’ 속의 왕의 남자는 광대 ‘공길(이준기 분)’이다. 하지만 진정한 ‘왕의 남자’는 세종시 전의면 출신의 상선 내시 ‘김처선(장항선 분)’이 아닐까?

김처선은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무려 다섯 명의 임금을 모셨던 왕의 남자였다. 내시도 등급이 있어서 연산군 대에는 200여명의 내시들을 이끄는 내시부의 수장인 종2품, 상선(尙膳)에 올랐다. 그런데 그는 연산군의 화살을 맞고, 연산군의 칼에 팔다리가 잘린다.

김처선의 1505년 4월1일 행적은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김처선은 당시 고위급 내시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부인과 양자가 있었다. 그날 아침 눈물로 배웅하는 아내와 아들을 물리치고 죽음의 길을 나섰다.

궁궐에서는 연산군이 연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처선은 왕을 향해 “이 늙은 놈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지만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다”고 말했다. 연산군이 격노해 쏜 화살이 가슴을 관통했음에도 “늙은 내시가 어찌 목숨을 아끼겠느냐”며 “다만 전하께서 보위에 오래 계시지 못할 것아 한스럽다”고 직언했다.

화난 연산군이 다리를 베고 “일어나 걸어보라”고 하자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겠느냐”고 대꾸했다. 계속 베었지만 김처선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바른 말을 했다.

연산군은 그 뒤로도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김처선의 고향인 ‘전의현(현 세종시 전의면)’을 행정구역에서 없애고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김처선의 고향집을 허물고 연못을 만들었다.

심지어는 과거시험 답안지에 ‘처’자를 쓴 사람의 장원급제가 취소되기도 했다. 절기인 ‘처서(處暑)’는 ‘조서(徂署)’로 바꾸고, 자신이 즐기던 ‘처용무(處容舞)’마저 ‘풍두무(豐頭舞)’로 불렀다고 하니 ‘뒤끝 작렬’이다.

그로부터 246년이 흐른 영조 27(1751)년에 김처선은 복권된다. 영조는 “왕 된 자가 충성한 이에 대하여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것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이니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할지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당시 충청도 연기군 전의면에 정려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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