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밥난로 불빛 대신에 온풍기가 돌아가고
눈꽃의 화음 아니라, 팽팽한 삶의 긴장이...
톱밥난로 불빛 대신에 온풍기가 돌아가고
눈꽃의 화음 아니라, 팽팽한 삶의 긴장이...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7.12.21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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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21일 동틀 녘, KTX오송역

<송년 에세이>

어차피 지정석도 있고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공지도 나오는데 이들은 왜 순례자처럼 엄숙히 줄을 섰는가. 사진=이재표 기자

기차하면 객창감이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새마을이 가장 빠르고 무궁화도 빨랐지만 통일은 더디게 오던 시절,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는 더듬더듬 모든 간이역에 들렀다. 그때 기차에는 짐 보따리와 큰 배낭, 통기타 따위가 실렸다.

곽재구 시인은 20대 초반에 쓴 <사평역(沙平驛)에서>가 일생의 대표작이 됐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해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로 끝나는 이 시의 ‘사평역’은 사실 지상 어디에도 없는 역이었다. 서울지하철 9호선에 사평역이 생긴 것은 그래서 아쉽다.

충북 보은에서 활동하는 송찬호 시인은 <민들레역>이라는 시를 썼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가 매여 있지 않은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먹고 있다.’ -이하 생략.

민들레역 역시 시인의 가슴 속에만 있는 상상의 역이다. 그런데도 그예 황간역, 그 다음 역을 검색해 본다. ‘추풍령역’이다.

2017년 12월21일 오전 6시55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KTX오송역.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사평역과 달리 300리, 500리 길을 출근하려는 이들이 잰 걸음으로 역사를 오간다. 대합실에 눈 시린 유리창도, 눈물을 던져줄 톱밥난로도 없다. 플랫폼에 유리로 지은 대기실에는 천장 온풍기가 돌아간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플랫폼. 사진=박상철 기자

7시13분, 서울로 가는 KTX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다. 어차피 지정석이고, 도착과 출발을 공지하는 안내방송이 수시로 나옴에도 엄숙한 순례자처럼 줄을 서는 이유는 무얼까? 열차는 정시에 도착했고 고개를 주억거릴 새도 없이 쏜살같이 역사를 빠져나간다.

국내 유일의 고속철도 분기역이자 행정수도 관문역을 자임하는 오송역은 2017년 12월 초 연간 이용객 600만명을 넘어서면서 하루 2만명 시대를 열었다.

오송역이 문을 연 것은 약 100년 전인 1921년이다. 조치원에서 청주로 가는 충북선의 작은 역이었다. 오송은 한때 청원군 강외면 오송리였으니, 시 속에 등장하는 사평이나 민들레역 같았으리라. 1983년 손님이 없어 여객 취급을 중지하고 화물만 취급하다가 2010년 경부고속철도 2단계 개통과 함께 다시 문을 열었다. 충북선 당시의 이름을 살려 KTX분기역도 ‘오송역’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2017년 12월, 오송역의 이름을 바꾸기 위한 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상에 걸맞게 ‘청주’라는 이름을 집어넣자는 여론이 대세다. 세종시 관문역이라는 역할을 고려해 ‘세종’이라는 지명을 병기할 수도 있다. 오송역에서 ‘오송’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흘러가는 것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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