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⑪ -양산팔경과 가곡리 제월당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⑪ -양산팔경과 가곡리 제월당
  • 변광섭
  • 승인 2021.03.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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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샅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스토리텔링
120년 5대를 이어온 제월당의 꿈
사진=김영창

 

고샅길을 걷다보면 모든 욕망이 덧없어진다. 신화와 전설이 켜켜이 쌓여있는 길, 돌담과 흙담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의 구릿빛 풍경이 오달지고 마뜩하다. 만화방창 꽃이 만발하고 녹음 우거지고 열매 가득하며 하얀 눈발 휘날리는 고샅길은 정처 없다. 풋풋하고 구순하다. 이 길을 걷다보면 어느 새 욕망의 옷을 벗고 맑은 햇살, 한 줌의 흙처럼 자유의 몸이 된다. 영동 양산팔경은 물과 숲과 고샅길의 풍경이 처처에 담겨있다. 숲과 계곡과 천년의 신비와 곡진한 삶의 염원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사, 물길을 품고 우뚝 서 있는 절벽에 붉게 빛나는 소나무와 정자와 조선의 시노래가 담겨있는 강선대, 낮은 산이지만 고샅길 마을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으며 드넓은 평야를 굽어보는 비봉산, 봉황이 깃들던 곳이라 해서 이름 지어진 봉황대를 보라.

선비들이 시를 읊고 글을 쓰며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알려진 함벽정, 진한 솔향 가득하고 햇살과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송호관광지와 조선시대 연안부사를 지낸 만취당 박응종이 낙향해 즐겼던 여의정, 대자연을 품으며 학문에 정진했던 자풍서당,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용암은 또 어떠한가. 양산팔경을 한 바퀴 돌고나니 시간은 어느새 과거에 머물고 알 수 없는 한바탕 꿈속의 잔치는 나를 먹먹하게 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비봉산이 있는 가곡리가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오래된 고택과 낮고 느린 골목길 풍경이 한유롭다. 낡고 병든 지붕과 아슬아슬한 담벼락을 보며 가뭇없이 사라진 옛 생각에 젖는다. 방앗간에서는 기름 짜는 고소한 풍경이 밀려오고 여러 개의 낡은 농협창고가 예사롭지 않다. 1910년 조양학당으로 시작해 112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양산초등학교를 들어가니 옛 것의 풍경과 오늘의 이야기와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고종황제 어의였던 변석홍(1846~1926) 선생이 일제 침략이 시작되자 1902년 이곳으로 낙향해 의술을 가르치고 생명의 가치를 전파했던 제월당. 봉황이 두 날개를 펴고 비상(飛上)하는 모습을 품고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한방의 풍경과 역사의 맥이 엄연하다. 1,000년 된 느티나무 아래에 서니 삶의 여백이 끼쳐온다. 풍경에 젖고 이야기에 젖으니 무량하다. 140년 넘게, 5대째 한의학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니 이곳은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다.

“사람을 살리는 의술로 나라와 백성의 곁에 있겠다.” 고종황제의 마지막 어의였던 변석홍 선생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애민정신이 가득했다. 탁월한 의술과 헌신적인 봉사를 인정받아 고종황제 곁에서 어의로 살았으며 정3품 벼슬을 받았다. 그렇지만 일제의 잔혹한 행위가 계속되자 더 이상 궁에 있을 수 없었다. 비봉산 자락으로 낙향해 제월당을 짓고 백성들의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자자해 밤낮없이 환자들이 문전성시였다. 그는 환자에게 진찰료를 받지 않았다. 침을 놓고도 단 한 푼 받지 않았다.

사진=김영창
사진=김영창

최고의 재료와 최고의 정성과 최고의 기술로 경옥고를 만들었다. 모든 질병의 치료는 발병 근원을 찾아야 한다며 맞춤형 진찰을 했다. 한 여인이 복통과 부종으로 여러 달 고생을 하다가 40리길을 걸어왔다. 

복통이 시작되기 전에 우물에서 물을 길었는데 두레박에 대추가 같이 올라오기에 별 생각 없이 먹었고, 그 후로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변석홍 선생은 이 처녀에게 뱀독을 풀어주는 석웅황을 달여 먹도록 했다. 그 약을 먹은 후 씻은 듯이 붓기가 가라앉고 복통이 멎었다. 

며칠 후 처녀가 찾아와 “왜 복통과 무관한 석웅황을 주셨느냐”고 물으니 “때는 가을이고 우물가에 있던 대추나무에서 빨간 대추가 우물로 떨어졌을 것이고, 우물 속에 있던 뱀이 개구리인 줄 알고 대추를 물었을 것”이라며 뱀독을 해독해야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변영목(1878~1923) 선생은 전국으로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시대적 아픔을 함께 극복하고자 저항했다. 침구술에 권위가 있었던 그는 의술을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우리나라 침구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변상훈(1902~1989) 선생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아 침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중풍과 관절염 치료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며 역대 대통령의 진료를 맡아 그 명성을 더했다. 변상훈 선생의 아들 변동섭(1925~1978) 선생은 혈맥을 다스리는데 능통했는데, 특히 난치병 치료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비록 지천명의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재능은 아들 변기원(1960~) 선생이 전수받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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