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⑬ - 충주 수주팔봉과 팔봉마을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⑬ - 충주 수주팔봉과 팔봉마을
  • 변광섭
  • 승인 2021.05.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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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떠 있는 듯 여덟 봉우리와 언택트 여행

 

개나리가 피면 그 옆에서 골담초가 피었다. 누가 더 노랗고 예쁜지, 누가 더 향기 가득하고 오래 가는지 내기라도 하듯 장독대 옆에서 나란히 피었다. 한쪽에서 꽃이 피면 다른 한쪽에서는 꽃이 지었다. 사월과 오월은 이렇게 꽃들이 피고 지고를 반복    했다.
어머니는 유독 장독대를 귀하게 가꾸었다. 큰 놈은 옹기, 작은 놈은 종기라고 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장독대 청소를 했다. 봄이 오면 여러 종류의 꽃을 심었는데 개나리와 골담초, 그리고 채송화가 봄 여름 가을날의 장독대 풍경이 되었다. 어머니 없는 장독대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꽃이 피고 향기가 나더니 벌들이 날아왔다.
‘골담초(骨擔草)’는 글자 그대로 뼈를 책임지는 풀이다. 옛사람들은 이름을 붙일 때부터 나무의 쓰임새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골담초는 한방에서 해수, 대하, 고혈압, 타박상, 신경통 등을 처방하는 데 쓰인다. 개나리가 피면 골담초도 핀다. 귀여운 나비 모양의 노란색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민가의 양지바른 돌담 옆에 심었다. 어린 시절에는 골담초 꽃을 따서 먹었다. 항아리에 걸터앉아 달고 향기로운 그 맛을 쪽쪽 빨아 먹었다.
개나리가 지고 골담초도 잎을 떨구었다. 진달래와 영산홍이 피었는가 싶더니 어느새 제 다 지고 여름이 왔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이팝나무가 하얀 꽃술을 터트렸다. 산과 들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나그네 가슴을 후볐다. 갑자기 외롭고 쓸쓸함이 밀려왔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한번 가보지 못했던 곳, 그렇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름하여 충주 수주팔봉이다.

수주팔봉은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 위치해 있다. 문주리 팔봉마을에서 달천 건너 동쪽 산을 바라볼 때 여덟 개의 봉우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아서 수주팔봉이라 부른다. 야트막하지만 날카로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그 모습이 당당하다. 조선시대 철종이 낮잠을 자다 수려한 산봉우리 여덟 개가 물속에 비치고 밑으로 수달이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잠에서 깬 후 영의정에게 이런 곳이 있는지 알아보라 해서 찾은 곳이 수주팔봉이다. 이에 왕이 직접 이곳으로 행차해 발을 담그고 좋아했다. 왕이 발을 담그고 쉬던 곳을 ‘어림포’, 왕이 걸어서 지난 곳을 ‘왕답’이라 부른다.
수주팔봉은 높이 493m로 야트막하다. 산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절경을 이루고, 송곳바위·중바위·칼바위 등 창검처럼 세워진 날카로운 바위들이 수직 절벽이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출렁다리가 있다. 동쪽으로는 푸른 산과 들녘이, 서쪽으로는 팔봉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달천의 맑은 물이 흐른다. 캠핑족들이 이곳에서 하룻밤의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과 <빈센조> 촬영지였다. 풍경 좋은데다 드라마 촬영지라는 소문이 나면서 언택트 관광지로 인기다. 
팔봉마을의 속살이 궁금했다.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처럼 달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고 있다. 예로부터 달천의 물맛은 조선 최고로 꼽았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우리나라 물맛은 달천수가 으뜸이며 오대산 우동수가 다음이고 속리산 삼타수가 세 번째로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마을에 팔봉서원과 와요지가 있다. 팔봉서원은 1582년에 창건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80년대에 복원되었다. 와요지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길이 2m, 폭 1.8m의 작은 굴가마이다.  팔봉서원의 건립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주말마다 문화행사가 열린다. 화가들이 정자에 앉아 수주팔봉 비경을 화폭에 담으려고 붓질을 한다.
팔봉마을에서 수주팔봉을 바라본다. 하늘이 있고 숲이 있다. 그 사이로 햇살과 바람이 눈부시다. 달천의 푸른 물살이 여유롭다. 마을의 고샅길 풍경 앞에 서니 유순해진다. 구순하게 비릿하게 아련하게, 때로는 정신까지 혼미하게 억겁의 풍경이 내게로 온다. 자연은 서로가 벗이 되고 희망이 되며, 서로를 토닥이며 함께 간다. 살아있음으로 존재의 이유가 되고 풍경이 된다. 사람의 마음만 정처없고 욕망과 아집과 이기심으로 얼룩져 있다. 이마저도 고달프다며 스스로 목을 꺾는 일이 허다하지 않던가.
고샅길을 걸으며 하늘을 보고 숲을 보며 흐르는 물살을 본다. 자연은 스스로 목을 꺾는 일이 없다. 존재 자체가 지구이고 우주이고 생명이다. 그 어떤 생명도 홀로 피어나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잘났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못났다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바람인가 싶었는데 억겁의 숲이 내게 말을 건넨다. 당신도 지구이고 우주이고 생명이라고. 순간 내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나의 삶이 부끄럽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누군가의 희망으로 살아온 날이 있었던가. 내 삶의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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