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⑲] - 청주 팔봉마을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이야기⑲] - 청주 팔봉마을
  • 글=변광섭, 사진=김영창
  • 승인 2021.11.2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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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 산봉우리를 품고 있는 마을,
김복진·김기진 형제의 예술세계가 깃든 곳

누구는 아침마다 글밭을 가꾸며, 누구는 춤을 추고 노래하며, 누구는 마른 땅에 씨를 뿌리며, 누구는 기타를 치고 바이올린의 선율을 다듬으며, 누구는 시심에 젖으며 새날을 연다. 희망을 담는다. 누구는 그림을 그리며, 누구는 음식을 하며, 누구는 오래된 옛 책을 찾아 나서며, 누구는 사라져 가는 풍경을 담으며, 누구는 고샅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다듬는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누구는 도시의 생태를 지키며, 누구는 민족을 뜨겁게 사랑했던 선열을 기리며, 누구는 날마다 선교와 돌봄으로, 누구는 이웃과 청소년을 보듬으며, 누구는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을 되살리며 저마다의 결을 만든다. 멋과 향기를 빚는다. 누구는 장애를 딛고, 누구는 가난을 딛고, 누구는 홀로의 외로움을 딛고, 누구는 이별의 아픔을 딛고, 누구는 실직과 부도의 시련을 딛고, 새날의 노둣돌을 놓는다. 노적성해(露積成海). 이슬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이 모든 것이 희망이다. 풍경이라고 쓰며 불멸이라고 부른다.

가을의 끝자락, 겨울이 오는 길목,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팔봉마을은 쓸쓸했다. 마을 뒷산에 여덟 개의 봉우리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팔봉마을이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그렇지만 하늘과 맞닿아 있고 마을과 들녘을 품고 있어 더욱 고즈넉하다. 지난 여름과 가을엔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알 것 같다. 이 마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과 문학인 김기진 형제의 생가가 있다. 문화지리학이라고 했던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의 환경이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김복진·김기진 형제의 삶과 문화도 이곳 팔봉마을의 풍경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들녘에서 바라본 팔봉마을과 팔봉산
들녘에서 바라본 팔봉마을과 팔봉산

 

정관(井觀) 김복진 선생은 불상 조각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 근대 미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해 조각을 전공했다. 귀국 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 경성여자상업학교와 경성공업학교 도기과(陶器科) 강사를 지냈다. 서울 기독교청년회 청년학관 미술과에서 조각을 지도하며 새로운 조각계를 태동시켰다. 문학과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신극운동 단체인 토월회를 만들기도 했다.

김복진 선생은 조선미술전에 출품한 「목」·「불상습작」·「나부(裸婦)」(특선)·「위이암(韋利巖)선생상」·「백화(白花)」·「소년」(특선)·「다산선생상(多山先生像)」 등의 작품이 있다. 1940년에 작고한 뒤 동생 김기진이 보관하였으나 6·25전쟁 중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는 또 1936년에 금산사 「미륵대불」과 1939년에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조각했다.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광복 이후 타인의 손을 거쳐 1963년에 변질된 형태로 완성되었고, 현재는 청동대불로 새 단장을 했다.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법주사로 여행할 때는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았던가.

방치돼 있는 조각가 김복진 생가
방치돼 있는 조각가 김복진 생가

 

그의 동생 팔봉(八峰) 김기진은 문학평론가·소설가·시인이다.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형인 김복진과 함께 일본 릿쿄(立敎)대학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유학생들의 연극단체인 토월회를 설립했다. 1923년 귀국 이후 문예단체 파스큐라와 카프 창립에 참가했으며 많은 시와 수필, 그리고 비평문을 발표했다. 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일보 등의 기자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기에는 친일 시와 글들을 남겼으며, 해방 이후 '애지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주필과 1961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을 지냈다.

형은 미술에, 동생은 문학에 평생을 바쳐온 것이다. 그런데 팔봉마을의 생가가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집은 외로움에 약하다.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이 끊어지면 뭐라도 끌어안고 싶다. 먼지, 거미줄, 고독의 파편들…. 빈집이 쓰러지는 이유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팔봉마을의 생가가 위태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듣자하니 이 고장 출신의 뜻있는 분이 생가를 매입하고 복원하기로 했다니 다행한 일이고 반가운 일이다.

바라건대 팔봉마을의 생가를 제대로 복원하고 이 일대를 대한민국 조각예술의 모항으로 가꾸면 좋겠다. 매년 국제조각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조각공원을 만들며 글로벌 미술인을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자.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예술의 마을로 발전하면 더욱 좋겠다. 한 해의 끝자락, 바람이 차고 매섭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기쁨과 영광도 있었지만 미련과 아쉬움 또한 적지 않다. 새날을 향해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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