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의 보들보들 클래식] 프로메테우스
[이영민의 보들보들 클래식] 프로메테우스
  • 이영민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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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의 역사 중에서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 할 수 있는 오페라의 시작은 1000년 넘게 유럽인들에게 잊혀있었던 그리스신화의 귀환과 그 맥을 같이한다. 암흑의 시기라 불렸던 중세의 흙먼지를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꿈꿀 수 있는 휴머니즘의 이정표를 당시의 예술가들은 찬란했던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문학에서 찾아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강요되거나 교육받은 삶의 양식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재와 관계에 대해 깊게 성찰하게 되었고 인간의 감정에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1600년경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첫 작업으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이야기를 선택했고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으로 끊임없이 재탄생되어 왔다. 시간이 흘러 계몽시대의 예술가들은 프로메테우스에게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스신화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이 아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판본에 따라 제우스의 명에 의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만들었다는 부분은 약간의 변형이 있지만 인간을 위해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해 문명이 시작되게 만들었다는 부분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계몽을 뜻하는 영어 enlightenment는 빛이라는 단어에서 태어났다. 불은 빛이고 지혜를 뜻했으므로 호기심 많고 문명의 발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계몽시대 이후의 유럽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가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이유로 충분했을 것이다. 이후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쇠사슬에 묶여 절벽에 매달린 그의 간을 독수리가 파먹게 하는 고통을 3000년 동안 받아야만 했다. 결국 영웅 헤라클레스가 활로 독수리를 물리치고 프로메테우스를 사슬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만들어주어 이야기는 승리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인류에 대한 애정과 우직한 저항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작곡가가 바로 베토벤이다. 1801년 초연된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Op.43’에서 베토벤은 강인하고 역동적인 필치로 베토벤다운 프로메테우스를 그려냈다. 특히 20대에 완성해놓은 그의 창작주제를 이 작품의 피날레에 사용함으로써 베토벤 시그니처 멜로디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 주제는 피아노변주곡 Op.35와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의 종악장에 사용되면서 그가 얼마나 이 주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한편 베토벤을 그토록 흠모했던 슈베르트도 괴테의 시에 가곡을 붙인 프로메테우스 D.674를 작곡한다. 불과 20대 초반이었던 슈베르트가 이 작품을 통해 시와 음악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내고자 하는 위대한 발걸음에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 낸 작품이다. ‘가곡의 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극적인 표현력과 화성의 과감함을 보여준 수작이다. 시간이 지나 독일의 작곡가 막스 레거는 이 작품을 관현악버전으로 새롭게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제 본격적인 낭만파 시대로 접어들면 헝가리출신의 작곡가 리스트를 만나게 된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작품을 선사했던 리스트는 교향곡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자유롭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는 새로운 형식인 교향시를 창안한다. 리스트는 모두 13개의 교향시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다섯 번째 교향시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리스트의 프로메테우스는 단 10여분 만에 청중들을 대서사시 속의 바다에 빠져들게 만드는 마성의 작품이다. 관현악법의 대가답게 강렬하게 몰아쳤다 따뜻하게 감싸주기도 하는 이 곡은 프로메테우스의 극적인 일대기를 압축해 속도감있게 전달한다. 
마지막으로는 러시아의 음악가 스크랴빈의 프로메테우스. ‘독창적’수사가 스크랴빈만큼 잘 어울리는 작곡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다섯 번째 교향곡(혹은 교향시로 분류하기도 한다)에 ‘프로메테우스 - 불의 시’라는 제목을 붙여두었는데 이 작품에서 특정 색으로 무대를 비출 것을 제시해 놓았다. 마치 조명이 주인공인 오페라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대사나 연기가 없기 때문에 청중이 보다 더 음악에 집중하며 상상력을 발휘가게 만드는 독특한 작품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동하며 불안한 시기를 보내야 했던 스크랴빈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프로메테우스의 처절한 투쟁의 스토리를 중첩시키며 새로운 음향의 세계를 선사한다.

추운 겨울 날 모닥불이나 난롯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바쁘게 살아오던 나를 잠시 잊고 갖가지 상념에 빠져들기도 한다. 수 천년동안 춤추는 불 앞에서 인류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신화들과 그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 낸 음악가들의 창조물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거대한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긴 겨울 밤 당신의 상상력의 지경을 넓혀 줄 그런 음악들을 지금 추천해본다.천해본다.  

 

베토벤의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 마르쿠스 포쉬너가 지휘하는 조지아 신포니에타의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공연실황으로 연주와 녹음 모두 인상적인 영상.

슈베르트의 가곡 프로메테우스를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음성과 벤자민 브리튼의 피아노 연주로 감상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음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실황으로 들어볼 수 있는 리스트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 젊은 지휘자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야니크 네제 세갱의 열정적인 지휘로 들어볼 수 있다.

음악은 약간 난해할 수 있지만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스크랴빈의 프로메테우스. 마르쿠스 스텐츠가 이끄는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연주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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