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의 연인·동지 후미코 청주서 살았다
‘박열’의 연인·동지 후미코 청주서 살았다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7.07.0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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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청원서 7년 거주…무기로 감형되자 자결
영화 <박열> 흥행열풍…불꽃같았던 그들의 삶 ‘주목’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의사. 사진=영화 <박열> 다음 포토뷰어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 이제훈‧최희서 주연)’이 뜨고 있다. 개봉일인 6월28일부터 일일관객 1위를 놓치지 않고 5일 만에 118만명을 돌파하는 무서운 기세다. ‘박열’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도쿄에서 6000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다.

제작비가 26억원에 불과한 비교적 저예산 영화지만,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조롱하며 고공흥행 중이다. 극중 이제훈이 분한 박열이 일왕가(日王家)를 조롱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에 반해서 그와 동거에 들어갔던 최희서 분 가네코 후미코의 캐릭터는 박열 못지않게 강렬하다.

극중에서 후미코와 박열을 열연한 최희서와 이제훈. 사진=다음영화 <박열>포토뷰어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일제에 항거하다 함께 대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일제가 국제여론을 의식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지만 후미코는 1926년 7월23일 우쓰노미야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박열과 후미코는 같은 해 3월23일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해 법적으로 부부였다. 박열은 1945년 10월27일 석방될 때까지 일제감옥에서 22년3개월을 복역했다. 박열은 1949년 귀국했으나 1950년 6.25 발발 직후 납북돼 1974년 북에서 사망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서전을 썼는데 이 책에는 23살로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아버지의 성을 사용할 수도 없었던 비운의 후미코는 어떻게 아나키스트로서 불꽃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그가 조선에서 살았던 7년의 생활에 있다. 후미코는 1912년 10월14일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入籍)하고 아버지의 누이(고모) 가메가 시집간 이와시타가(岩下家)가 있는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 맡겨지게 된다.

옥중에서 결혼하고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을 영화가 재현했다. 실제 사진은 나중에 일본신문에 실린다. 사진=다음영화 <박열>포토뷰어

양녀가 될 줄 알고 온 조선생활은 식모살이 그 이하였다.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는 후미코의 조선생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2년 가을, 고모 집의 양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조선에 왔으나 오래지 않아 양녀에서 밀려나고 열두세 살 때부터는 사실상 식모로 전락하여 친할머니와 고모의 온갖 구박을 다 받으며 학교를 다니게 된다.

습자지나 그림물감 등 학교 준비물을 제대로 안 챙겨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엌일을 하다가 솥을 깨뜨렸다고 솥 값을 변상하게 하고, 정월 초에 떡국을 먹다가 할머니의 젓가락이 부러졌다고 집 밖으로 쫓아내고, 못사는 집 애와 학교 등하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말 안 듣고 함께 다녔다고 매타작을 한 후 헛간에 이틀이나 가두고, 그 일로 두 달이나 학교를 못 가게 한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는 한여름에 집에 다니러 온 할머니 친척의 애를 업고 그 친척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할머니에게 짓밟혀 집밖으로 쫓겨나 이틀이나 먹지 못하고, 그 길로 자살을 결심하여 철길로, 강으로 내달렸으나 결국 자살을 포기한다.

학교에서는 운동이나 놀이를, 가정에서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가네코 후미코는 급기야는 책을 읽고, 잡지와 신문을 보는 것마저 금지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네 살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가네코 후미코는 그로부터 일본으로 돌아올 때까지 2년 동안 하루 종일 할머니의 심술궂은 감시를 받으며 완전히 고모 집의 식모로 일한다.

재판정의 두 사람. 사진=다음영화 <박열>포토뷰어

1912년 11월 부강공립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한 후미코는 1917년 3월24일 부강공립고등소학교를 졸업했다. 후미코는 1919년 조선인들의 만세운동에 큰 감동을 받고 1919년 4월12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미코가 살았던 부용면 부강리는 2012년 7월 세종시 출범 과정에서 충북도에서 세종시로 편입됐다.

한편 박열의 고향은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현 문경시 모전동)다. 하지만 형 박정식 등 가족들은 1936년에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박열은 첫 공판에 조선 관복을 입고 등장해 일제를 조롱했다. 사진=다음영화 <박열> 포토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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