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벽화 작가 이종구 어르신 (2)
[인생극장] 벽화 작가 이종구 어르신 (2)
  • 박영근 기자
  • 승인 2023.06.15 08: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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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그림 그려 공모전 '대상'…화가의 길
어려서부터 그림·글씨에 소질…평생을 그림과 함께
이종구 어르신이 청주 서원구 사직1동 행정복지센터 게스판 뒷면에 벽화 밑그림 그리기 작업을 하고 있다.
이종구 어르신이 청주 서원구 사직1동 행정복지센터 게시판 뒷면에 벽화 밑그림 그리기 작업을 하고 있다.

 

이종구 어르신은 1947년 옥천 안내면에서 소작농의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이 계셨고 아래로 총 8명의 동생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남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는 데다 규모가 작아 열두 식구 끼니 해결도 벅찼다.

부친은 장남을 교육시켜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면 동생들을 책임지겠지 하는 생각에 형님의 교육에만 신경 쓰셨다. 그 덕분인지 형님은 고등학교를 거쳐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셨다.

부친은 이종구 어르신을 농사꾼으로 만들 요량이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논밭에서 일했다. 부친은 이종구 어르신이 책 읽는 것조차 싫어하셨다. 허리춤에 책을 숨겼다가 부친 몰래 틈틈이 책을 읽었다. 영어, 수학 등을 독학했다.

한편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스케치북도 없어 갱지에 먹물이나 잉크로 그림이나 만화를 그렸다. 초등학교 재학 시 사생대회가 있으면 학교 대표로 뽑혀 참가하기도 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로부터 포스터 숙제를 대신 그려달라 부탁받고는 그려주었다. 그 포스터 덕분에 친구는 상을 받았다.

 

이렇게 지내다간 평생 농사만 짓겠다 싶어 열여덟 살에 무작정 부산으로 갔다. 프린트사(일종의 인쇄소)에 취업해 필경을 배웠다. 부산 남일초등학교에 필경사로 취업했다. 글씨를 잘 썼다. 차트병(일종의 행정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건설부 항만건설국에 차트사로 취업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형님께서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장사를 해보라고 권유하셨다.

형님 말씀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중랑구 면목동 동원시장에 자그마한 잡화점을 차렸다. 그 무렵 형님은 국정 교과서(자연 과목) 집필위원으로 활동하셨는데, 이종구 어르신에게 교과서에 수록할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해 그려주었다. 얼마 후 모아놓은 돈으로 골판지 박스 공장을 인수해 운영했다. 하지만 부도가 났다.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해 청주로 내려와 우암동에 간판집을 차렸다. 그 후 육거리, 문화동, 영운동, 사직동으로 옮겨다니며 간판집을 운영했다.

사직동에서 간판집을 운영하고 있을 때 인생의 큰 전환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한국예술문화협회가 주최하는 작품 공모전에 출품한 것이다. 한국화(산수화, 풍속화) 작품을 3점 냈다. 그런데 1점은 동상, 2점은 특선을 수상했다. 첫 출품치고는 큰 상을 받았다. 공모전이 별거 아니라는 오만함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이듬해 또다시 한국예술문화협회 공모전에 한국화(산수화) 1점을 냈다. 대상을 수상했다. 정말 놀랐고 기뻤다. 그 후 이종구 어르신은 한국예술문화협회 공모전 심사위원장을 거쳐 협회장을 역임했다.

간판 제작 기술도 컴퓨터·디지털화하면서 기존 방식으로 간판집을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2013년경 간판집을 폐업하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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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2023-06-15 12:23:15
고달픈 인생항로에서 비로서 길을 찾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