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무심천 벚꽃 12일 만개…그 100년의 유래
올 무심천 벚꽃 12일 만개…그 100년의 유래
  • 이재표 기자
  • 승인 2017.04.06 06:58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14년 ‘청주청년회’ 첫 식재, 1970년대 초 다시 심어
첫 심은 이, 청남학교 설립한 민족운동가 김태희 선생?
만개한 무심천 벚꽃을 만낃하는 청주시민들. 2011년. 사진=청주시

10월31일이 가까워지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오듯이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벚꽃엔딩’이 귓가에 간지러운 4월 초순이다. 청주기상지청은 청주 무심천 벚꽃이 4월12일쯤 활짝 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벚꽃이라는 것이 피는 것은 더디어도 지는 것은 허망해 만개하자마자 꽃비를 흩뿌릴 수도 있다. 봄비가 나우 내리거나 고약한 바람이라도 불면 활짝 피기도 전에 꽃잎을 날릴 수도 있으니….

따라서 봄철 청주의 장관인 무심천 벚꽃은 지금부터 즐겨야한다. 청주기상지청은 5일, 표준관측목인 무심천 하상도로 분기점에서 청주대교 방면으로 첫 번째에서 세 번째 왕벚나무가 개화해 일주일 후 만개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표준관측목의 개화는 최근 10년 평균과 같았으나, 지난해보다는 나흘이 늦었다.

기상지청에 의하면 청주의 3월 평균기온은 6.8도로 지난해(7.3도)보다 0.5도 낮았으며, 최근 10년 평균(6.7도)보다는 0.1도 높았다. 벚꽃 개화는 기온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한 개체에 많은 꽃이 피는 다화성 식물인 벚꽃은 한 나무의 한 가지에 세 송이 이상 꽃이 활짝 피었을 때가 개화 기준이다. 기상지청은 1999년부터 무심천 일대를 벚꽃 군락단지로 지정해 꽃피는 시기를 관측하고 있다.

무심천 벚꽃은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장관을 이루지만 벚꽃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쿠라’라는 점에서 곱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벚꽃은 일본인들이 선호할뿐 일본의 국화(國花)는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왕실문양은 ‘국화(菊花)’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무궁화처럼 나라꽃을 지정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전북 군산의 ‘전군가도’ 100리 길에 심긴 7000그루 가까운 벚나무는 군산이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 항구였다는 점에서 친일유산 취급을 받는다. 실체는 1975년, 재일교포들이 낸 700만원에 국·도·시비를 더해 심은 것이다.

2400여 그루가 무심천을 따라 심긴 벚꽃군락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 장관이다.

벚꽃을 심은 것은 1914년, 김태희?

그렇다면 청주 무심천 벚나무는 누가 언제, 처음 심은 것일까? 1923년, 청주에 거주했던 ‘오쿠마 쇼지’가 쓴 <청주연혁지>에는 “1914년(대정3) 3월에는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하여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일대에 벚꽃을 식재하고 서로는 성서정(城西停)의 제방, 동으로는 성동정(城東停)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나서 몇 년이 되지 않아 개화를 보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오쿠마 쇼지가 <청주연혁지>를 쓴 것은 ‘청주청년회’가 벚꽃을 심은지 9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때부터도 무심천 벚꽃은 장관을 이뤘나 보다. 오쿠마 쇼지는 <청주연혁지>에서 “만약 그것이 한 꽃이 피는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긴 제방에 많은 가지에서 휘늘어진 꽃송이가 흰 구름이 낀 것과 같고 어떤 때는 눈(雪)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1만의 시민은 너도나도 들떠서 취기에 걷는 모양이 비틀비틀 하는 것 같아 무리를 지어 일렬로 꽃 아래를 거닐었다. 원근의 도시인은 증기기관차를 이용하여 와서 감상을 하다가 돌아가는 것을 잊기도 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1950년대 청주공고 위 무심천 제방. 당시 경찰 기마순찰대가 외출을 나왔다. 사진출처= 이재표 저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수동>

혹자는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이라는 문구 때문에 ‘청주청년회’를 일본인 조직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필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쓰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오히려 일제가 허문 망선루를 복원하고, 민족교육기관인 ‘청남학교(현 청남초 전신)’를 설립한 민족운동가 김태희 선생이 만든 ‘청주청년회’가 아닌가 짐작이 되기도 한다.

김태희 선생은 1877년, 청주시 탑동에서 태어나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청주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간 대표적인 인물이다. 1909년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했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몰래 보냈다. 1920년 9월, 상해임시정부 연통제의 충청북도참사(忠淸北道參事)로 임명된 것만 봐도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다. 다만 청주청년회를 공식 창립한 시점이 1920년 6월19일이라는 점에서 두 청주청년회가 서로 다른 단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태희 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점에서 공식 창립 전에도 청주청년회가 활동했을 수 있다.

1970년대, 1990년대 현재의 벚꽃군락 조성

채동환 11대 청주시장

현재의 벚나무들은 100년 전의 그 벚나무들이 아니다. 1970년대 초반, 무심천 제방 석재를 흙으로 덮는 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벚나무로 수종 갱신이 함께 이루어졌다. 당시 찬반논란 속에 이를 추진한 사람은 채동환 11대 청주시장이다. 채동환 전 시장의 재임기간은 1971년 8월10일에서 1976년 4월21일까지다. 채 전 시장은 청주체육관 앞 도로확장, 상당공원 조성, 우암산 순회도로 개설 등 현대 청주시의 기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벚꽃 길의 위세는 1990년대 초반에 갖춰진 것이다. 1970년대에 조성한 벚꽃군락은 청주대교에서 제1운천교 안쪽까지였다. 운천교 북쪽에는 아름드리 수양버드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4,5월 눈처럼 흩날리는 버드나무 꽃가루가 눈병과 알레르기를 유발한다고 알려지면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됐다.

결국 그 자리에 한 그루, 한 그루 버드나무 대신 벚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현재 2400여 그루가 심긴 무심천 벚꽃 길이 형성됐다. 하지만 수세(樹勢)를 유지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 병충해로 인해 고사가 진행되는 나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청주시는 2013년, 5000만원을 들여 벚나무가 없거나 고사한 제2운천교-용평교 구간에 산벚나무 190그루를 심었다. 이때 보식한 벚나무는 무심천 왕벚나무와 산벚나무를 접목시켜 생산했다.

벚꽃이 지고나면 체리를 닮은 벚나무 열매 ‘버찌’가 새카맣게 익어간다. 몸에도 좋고 맛도 그만인 버찌지만 무심천 버찌는 식용으로 매우 부적합하다. 도로 변에 있어서 각종 오염물질에 노출돼 있고, 병충해 때문에 방제를 하거나 수간주사를 놓기 때문이다. 무심천의 버찌는 인도에 떨어져 까맣게 짓밟힐 운명을 안고 영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순실 2017-04-06 09:36:46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나도 그렇다

시민 2017-04-06 07:56:47
하루사이 무심천에 벚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기사 유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