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자리, 신화와 종교, 과학의 비빔밥
황소자리, 신화와 종교, 과학의 비빔밥
  • 박한규
  • 승인 2017.12.01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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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 숨어있는 천문현상
황소자리와 양자리가 겹쳐 있는 그림. 지구의 세차운동에 따른 것이다. 사진출처= The glorious constellations. 출판사는 Harry N. Abrams, INC. publisher, new york.

초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그리스신화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넘쳐나는 주인공들과 괴물들, 특히 밤하늘에 신들의 운명을 별자리로 새겨 넣었다는 상상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20년을 잊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만난 건 천체관측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목동들이 만들었다는 별자리에는 그들만의 신화와 천체관측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별자리와 연관된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그 터무니없음으로 하여 어린 나를 붙들었지만, 실제 관측한 하늘의 별자리와 어울리는 메소포타미아 특히, 수메르-바빌로니아 신화는 어른이 된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길가메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다. 이 서사시는 기원전 20세기에 지어진 작품으로 보통은 단순한 옛날이야기로만 알고 있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길가메시와 얽힌 이야기에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천문현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시국가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는 폭군이었다. 신들이 야만인 엔키두를 만들어 길가메시와 대적하게 하였으나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길가메시를 두려워하였으나 여신 인안나는 길가메시의 야성미에 반해 청혼을 하게 된다.

여신 인안나는 태양신 우투의 동생이며 최고의 신이자 하늘신인 안의 손녀였다. 인안나는 사랑의 여신으로 많은 애인을 두고 있는 바람둥이였다. 여신의 청혼을 받은 길가메시는 여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많은 애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이야기하며 욕하고 손가락질한다.

길가메시로부터 모욕을 받은 인안나는 하늘신 안에게 찾아가 하늘의 황소 구안나를 빌려 길가메시에게 복수하려고 하지만 하늘의 황소가 지상으로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는 하늘신은 거절한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요청과 협박을 거듭한 끝에 황소를 빌리는데 성공한다.

하늘의 황소가 땅에 도착하자마자 목이 마른 나머지 모든 지상의 강물을 마셔 버리고 배가 고픈 나머지 땅위의 모든 곡식을 먹어치워 버렸다. 기근과 목마름에 지친 사람들은 길가메시 왕에게 황소를 없애줄 것을 요청하고 길가메시는 엔키두와 함께 하늘의 황소와 7일 낮 7일 밤을 싸운 끝에 하늘의 황소를 죽이고 만다.

기근과 목마름이 해결되자 백성들과 함께 하늘의 황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데, 여인 하나가 구슬피 우는 게 아닌가. 즐거운 잔치에서 우는 행동에 화가 난 엔키두가 황소 뒷다리를 잡아 뜯어 여인에게 집어 던졌다. 그 여인이 바로 인안나였다. 사실 하늘의 황소는 인안나의 형부로 지옥의 신이었다. 인안나는 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황소를 하늘의 별로 만들었다.

별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 같지만 황소의 죽음과 죽은 황소의 뒷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는 말한다. 황소의 죽음은 세차운동으로 인한 춘분점의 이동을, 뒷다리 없음은 새로운 춘분점의 기준이 되는 양자리의 탄생을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춘분을 새해의 기준으로 삼고 성대한 신년축제를 열었다. 따라서 춘분이 언제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지금은 춘분이 물고기자리에 있지만 기원전 2100년부터 서기 전후로는 양자리에,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까지는 황소자리에 춘분날이 위치하고 있었다.

춘분점이 대략 2100년 주기로 별자리를 옮겨가는 이유는 세차운동 때문이다. 세차운동이란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 궤도 면에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지구의 팽이운동을 말한다. 세차운동의 주기는 약 2만6000년으로 황도 12궁으로 나누면 대략 2100년마다 춘분점이 별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세차운동을 처음 밝힌 사람은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인 히파르코스였지만 춘분점이 이동한다는 사실은 오랜 관측을 통해 바빌로니아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길가메시가 회자되던 기원전 2000년대에는 이미 춘분점이 양자리에 있었다. 춘분점을 황소자리로 하는 이론적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관측을 통해서는 이미 양자리 춘분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의 죽음은 세차운동으로 인한 춘분점의 이동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어느 별자리가 오래된 별자리일까 고민이 된다면 큰 별자리를 찾으면 된다. 큰곰자리, 황소자리, 전갈자리, 물병자리, 처녀자리, 사자자리, 물고기자리 등이 오래된 별자리다. 처음 빈 하늘에 별자리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귀퉁이에 코딱지만 하게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황소자리 또한 춘분점이 위치한 별자리였기에 상당한 크기였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춘분점을 양자리에게 양보하고 하늘에 영역을 만들자니 황소 뒷다리 부근에 양자리를 내어준 덕에 오늘날 황소자리는 머리와 몸통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황소자리와 양자리의 넓이를 합하면 밤하늘에서 가장 큰 별자리인 바다뱀자리나 처녀자리에 버금간다.

후기 신석기와 초기 청동기 시대, 문자가 발명되어 왕성한 천체관측을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 춘분점이 있던 별자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가장 거대한 별자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황소자리는 미노스 황소 또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임무, 또는 제우스가 강을 건널 때 변신한 황소 따위로 나타나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저 넓은 하늘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거나 위력을 갖는 황소가 등장하지 못한다. 게다가 뒷다리가 없는 부분에 대한 해명도 없다.

세차운동의 실체는 알지 못했을 지라도 세차운동으로 인한 결과는 관측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세차운동이 고대 천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세차운동으로 인한 춘분점의 이동을 강조하는 대표적 유물이 토록토니다. 토록토니는 1~4세기 로마 군인들 사이에 유행한 미트라 비밀 종교에서 남아있는 유물로 남신이 거대한 황소를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물론 황소는 황소자리를 의미한다. 춘분점이 황소자리에 있던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왔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초기 예수교 수도사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의 징표로 몸에 지녔던 것이 물고기 두 마리 조각이었다. 물고기자리를 상징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춘분점이 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로 넘어가는 시기가 서기 0년을 전후한 시기, 즉 예수 탄생과 일치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물고기자리에 춘분점이 있는 동안을 예수의 시대라 믿었기 때문에 물고기 조각을 지니고 다녔다. 지금도 교회에 가면 스테인드글라스에 물고기 두 마리가 조각된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제 곧 물고기자리에서 물병자리로 춘분점이 이동한다. 천문학적 의미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신화와 종교와 과학은 다가오는 새 시대를 맞아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설레는 마음으로 22세기를 상상한다.

청주가 고향인 박한규는 흉부외과 전문의로, 현재 경남 창원시 진해에 있는 늘푸른요양병원 병원장이다.박한규 원장은 키만큼 커다란 망원경으로 별보기를 좋아하는 어른아이다. 또 신화와 역사 그리고 과학을 넘나들며 엿보는 재미에 빠진 일탈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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