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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캐럴, 벚꽃엔딩

12‧12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광장으로 끌어낸다. ‘민족문화와 국학’을 내세운 관제행사의 이름은 ‘국풍81’이었다. 국풍81에서 곱슬머리의 대학생이 ‘바람이려오’를 불러 가요제 금상을 받았다. 그가 바로 1년 뒤 신곡 ‘잊혀진 계절’ 하나로 가수왕에 오른 ‘이용’ 씨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되는 ‘잊혀진 계절’은 ‘조용필=가수왕’이라는 공식을 깨뜨렸다. 그로부터 36년,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이라는 노랫말처럼 해마다 돌아오는 시월이면 노래 ‘잊혀진 계절’이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아온다.

그런데 ‘잊혀진 계절’보다 더 끈질긴 생명력이 예상되는 노래가 있다. ‘장범준’이라는 가수가 부른 ‘벚꽃엔딩’이다. 예전처럼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고 가요순위 프로그램이나 연말 ‘가수왕’이 사라진 터라 ‘장범준이 누구고, 벚꽃엔딩은 또 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장범준이라는 가수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라는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얘기하면 “아하, 그 노래”하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 웬만한 이들은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은 몰라도 감미로운 선율과 속살대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으리라.

올해도 벚꽃엔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벚꽃이 피기 전부터 꽃잎이 다 흩날린 뒤에도, 벚꽃이 피고 지는 기별을 이 노래를 통해 듣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는 한 이 봄, 이 노래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런데 이 노래를 막상 불러보자니 가사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가사를 꼬치꼬치 새겨들은 것이 아니라 그림을 감상하듯 공감각으로 음미해왔을 뿐이다. “봄바람 휘날리며~”로 시작하는 후렴부도 그 한 소절만 정확히 떠오를 뿐 그저 콧노래로 허밍 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다 가사를 꼼꼼히 뜯어보니 한 소절, 한 소절이 ‘비문(非文)’이다. 봄바람은 휘날릴 수가 없다. 봄바람은 옷자락, 또는 머리칼 등을 날리게 만들 뿐이다. 더군다나 ‘날리’라는 어근에 ‘휘’라는 접두사가 붙는다면 최소한 ‘태극기’ 정도는 휘날려야 할 것 같다. 내가 가사를 썼다면 “봄바람 살랑대는”이 됐을 것이다.

그 다음 소절은 “벚꽃잎이 울려 퍼질”인데 이 또한 비문이다. 벚꽃잎이 울려 퍼진다고? 울려 퍼지는 것은 반드시 소리여야 한다. 이쯤 생각하다가 문득 허망해진다. 대학생활 초반까지 시인이 되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살다가, 쓰긴 쓰는 직업인데 기자가 되어 22년째 메마른 글을 쓰면서 갖게 된 ‘딱딱한 사고’에 갇힌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다. 김광균의 시 <외인촌>의 그 유명한 한 줄,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청각의 시각화, 즉 공감각화다. 벚꽃잎이 울려 퍼진다는 것은 반대로 시각을 청각으로 바꾼 것이다. 더욱이 벚꽃엔딩은 대중가요다. 중요한 것은 문법적 완성이 아니라 대중적 공감이다.

장범준이 2012년 벚꽃엔딩을 발표한 이후 5년 동안 받은 저작권 수입은 약 6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저작권 문제 때문에 거리에서 크리스마스에 캐럴이 사라졌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지적재산권은 강화됐다. 벚꽃엔딩을 ‘봄의 캐럴’로 만든 것은 장범준의 감수성이지 결코 국어실력이 아니다.

이재표 기자  gajad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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