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곁에 영혼만 묻힌 ‘독립운동가 박자혜’
단재 곁에 영혼만 묻힌 ‘독립운동가 박자혜’
  • 이재표
  • 승인 2019.02.2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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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선생의 부인이자 동지…‘간우회’ 활동 체포 뒤 중국 망명
1920년 베이징에서 결혼, 2년 후 귀국 두 아들 키우며 독립운동
1936년 2월, 뤼순서 단재 시신 수습…1943년 병사, 위패만 합장
단재의 순국 83주년이 되는 2월21일, 며느리 이덕남 여사 등 유족들은 서울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사진은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신채호, 박자혜 부부의 동상. 사진=이재표 기자
단재의 순국 83주년이 되는 2월21일, 며느리 이덕남 여사 등 유족들은 서울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사진은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신채호, 박자혜 부부의 동상. 사진=이재표 기자

20192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 서거 83주년이 되는 날이다. 기개가 추상(秋霜) 같았던 단재의 넋은 고독하게 환국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 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도종환 시인은 1985년에 발표한 시 <고두미 마을에서>를 통해 1936221일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화장돼 오동나무함에 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우국지사 단재의 귀환을 이렇게 노래했다.

단재는 순국 이틀 뒤인 223, 뤼순에서 화장돼 이튿날 오후 서울에 도착한 뒤 청주로 운구돼 고향인 귀래리 옛 집터에 암장됐다. 1941년에야 한용운, 오세창 선생이 묘표비를 세웠고, 20085, 영당 뒤 현재의 위치에 묘역이 조성됐다.

단재의 고혼(孤魂)도 외롭게 돌아와 고향에 깃들었지만 그의 부인인 박자혜 여사의 삶과 죽음 역시 그러했다. 단재 묘소에는 박자혜 여사의 위패만 묻혀있을 뿐이다. 1943년 서울에서 쓸쓸히 병사한 뒤 화장돼 한강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유골은 없지만 위패를 함께 묻는 이른바 합폄(合窆)’이 이뤄졌으니 두 분의 넋은 함께 깃들었으리라.

박자혜 여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일제에 분연히 항거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독립운동가 박자혜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097월에는 국가보훈처가 3·1운동 당시 박 여사가 간우회회원을 모아 독립만세를 주도하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높이 사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박자혜 여사는 18951211,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집안 살림이 궁핍했던 듯 어린나이에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가 약 10여년 궁녀 생활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궐에서 나왔다.

숙명여고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 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사립 조산부(助産婦)’ 양성소를 다녔고 이후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사로 취업했다.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신채호 선생의 묘소. 묘소는 한용운, 오세창 선생이 만들어 세웠다. 박자혜 여사는 1943년 세상을 떠난 뒤 화장해 한강에 뿌려져, 위패만 합폄했다. 사진=이재표 기자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신채호 선생의 묘소. 묘표는 한용운, 오세창 선생이 만들어 세웠다. 박자혜 여사는 1943년 세상을 떠난 뒤 화장해 한강에 뿌려져, 위패만 합폄했다. 사진=이재표 기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3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여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에 총칼에 다친 조선인들이 병원으로 실려 왔고 박 여사는 그들을 치료하면서 독립운동을 결심했다.

박 여사는 간호사들을 모아 간호사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었고 조선인 의료진들에게 동맹파업 등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의원 내에서 열변가로 유명한 피부과 김형익 의사와 함께 비밀리에 연락을 이어가며 조직적 움직임을 도모했다. 외과 신창엽은 35일 사직했고, 산부인과 김달환과 연구과 김영오는 각각 324일과 326일부터 무단 휴무를 감행했다. 내과 김용채도 328일 말없이 의원에 나가지 않았다. 소아과 권희목도 330일 사직했다. 동료 간호사 네 명도 모두 사직했다.

당시 일제의 조선인 감시보고서 사찰휘보는 박자혜를 이렇게 평했다.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

결국 일경은 박자혜를 체포했다. 유치소에 수감됐던 그녀는 다행히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의 만세 운동의 책임을 지고 신병을 인수하면서 풀려나게 됐다.

박 여사는 일제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남아있지 않았다. 박 여사는 중국 망명의 길을 택했다. 베이징에서 옌징대(연경대, 북경대의 전신) 의예과에 입학했으니, 조국의 현실에 한 눈만 질끈 감으면 안락한 삶이 보장될 터였다.

 

영양실조로 숨진 뒤 한 줌 재로 한강에

박자혜 여사와 신채호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박자혜 여사와 신채호 선생.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이듬해인 1920, 박자혜 여사는 베이징에서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박 여사는 단재와의 만남에 대해 훗날 이런 글을 남겼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됐던 것일까?

단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충북)에 피선되고 신대한을 창간해 주필로 활동했으나 임시정부의 노선에 실망감만 안고 19204,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이때 중매로 연을 맺어준 이는 베이징에서 터를 잡고 독립운동을 하던 이회영(이시영 선생의 형·1932년 고문 끝에 옥사) 선생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였다.

단재 선생에게도 범부의 행복이 있었다면 베이징의 허름한 뒷골목인 챠오떠우후퉁(炒豆胡同)’에서의 짧았던 2년이었을 것이다. 감히 그렇게 생각해본다. 42살이 되던 이듬해 장남 수범 씨를 낳았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단재는 박 여사가 둘째를 임신하자 아들 수범과 함께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극심한 가난 때문이었다.

단재는 1923년 김원봉과 만나 의열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고위 관료와 친일파 암살, 일제 통치기구 파괴 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의열단으로서의 삶은 더욱 위험하고 안정적이지 못했다.

박자혜 여사의 산파소를 다룬 당시 기사.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박자혜 여사의 산파소를 다룬 당시 기사.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22년 서울로 돌아온 박 여사는 생계를 위해 산파소를 열었지만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인해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단재의 부인 박자혜 여사가 운영하는 산파소 경영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산파소 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도리어 남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 (중략) 산파소 간판이 걸린 초가집 대문을 넘어 문턱에 들어서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한 칸 방에 박자혜가 앉아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어려웠다.”

산파소는 문을 닫았지만 박자혜 여사는 단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임무를 지원했다. 192612, 나석주 열사는 조선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서울 지리를 전혀 알지 못하던 나석주 열사는 사전에 현장을 답사할 때 박 여사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19295, 단재가 타이완의 지룽항에서 체포된 뒤에도 박 여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박 여사는 다렌 뤼순 감옥에 있는 단재에게 하소연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답장은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박 여사는 거리에서 참외장사도 마다하지 않으며 첫째 아들을 한성상업학교까지 졸업시켰다. 일경들은 아들 수범이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 책가방을 뒤지는 등 감시와 폭력을 이어갔지만 박 여사와 아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362,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 불명. 생명 위독이라는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박 여사는 곧장 뤼순으로 갔지만 단재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박 여사는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 여사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작은 성냥 한 개로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가신 영혼이나마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박자혜 여사는 신채호의 시신과 함께 귀국했다. 신채호가 작고한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해 해외로 떠났다.

둘째 아들인 두범은 1942년에 숨을 거뒀다. 이후 홀로 셋방에 살던 박자혜 여사는 19431016, 49살의 나이에 영양실조에서 비롯된 병으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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