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택배, 63년 한 길..충북에서 세계로
대신택배, 63년 한 길..충북에서 세계로
  • 오옥균 기자
  • 승인 2020.06.03 09:2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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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트럭 3대로 창업, 세계 누비는 대표 물류기업으로 성장

언제부턴가 기업유치는 자치단체장의 제 1공약이 됐다. 그만큼 기업유치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기업을 유치하면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생산활동을 통해 창출되는 소득은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기업의 지역기여도를 놓고 보자면 유치 기업보다도 우리 지역에서 출발해 성장한 향토기업이 가지는 가치가 더 크다는 점이다. 향토기업의 성장은 지역사회 환원으로 선순환되며, 크고 작은 순기능을 발휘한다. 이렇듯 향토기업의 성장은 중요하지만 아쉽게도 충북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성장한 향토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에서 충북의 대표적인 향토기업 대신정기화물자동차㈜를 조명하는 이유다.
 

오흥배 대신정기화물자동차(주) 회장. 사진=박상철 기자.

 

오흥배 대신정기화물자동차㈜(이하 대신택배) 회장과 인터뷰하는 날, 대신택배 본사(청주) 직원 200여명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정부의 재난지원금 전액을 반납(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총액은 1억 2000만원 가량이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전 직원이 기부를 결정한 배경이 궁금해졌다. 오 회장은 “나라 재정이 어렵다. 우리 회사가 코로나19로 경영상황이 악화된 것도 아니고 직원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직접적인 방역 업무를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직원들도 코로나19 확산을 막는데 일조했다. 그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 뜻을 모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직원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게 아니다. 기부한 만큼 상여금으로 돌려줄 계획이다. 오 회장은 “기업운영만 잘하면 상여금 더 지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1956년 싸전으로 시작한 대신정기화물. 사진=박상철 기자.
1956년 싸전으로 시작한 대신정기화물. 사진=박상철 기자.

 

종사자 5000명, 1일 20만 건 배송
대신택배는 1956년 선친이 운영하던 싸전에서 트럭 3대로 거래처에 쌀 배달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10년 뒤 1966년 충북 1호 화물운송 법인으로 재정비해 지금까지 60여년 동안 도로를 이용한 화물 운송 한길만 걸어왔다.

직원 예닐곱 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63년의 세월이 쌓이면서 전국에 800여개 영업소를 갖춘 업계 최고 규모로 성장했다. 560여개의 정기노선을 운행하고 있고, 본사와 영업소 등에서 50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1일 물동량만 20만 건 이상이고, 전국에 20여개 물류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320억원을 들여 인천에 물류터미널을 건설한데 이어 대구물류터미널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화 한 통, 클릭 한 번으로 집에서 편하게 받아보는 택배 서비스는 우아한 백조의 물갈퀴질과도 같다. 물건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분류와 운송을 반복하며 8단계를 거쳐야 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또한 시간과 전쟁이다. 시스템을 잘 갖춘 터미널을 보유한다는 것은 소요 시간을 줄이는 것이고, 타사와 경쟁에서 경쟁에서 우위를 지킨다는 의미다. 인천터미널을 건설하기 전 세계 일류 터미널을 견학했다는 오 회장은 “세계 어느 터미널과 비교해도 경쟁력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사업은 투자의 연속이다. 현재 대구터미널을 조성하고 있고, 대구가 마무리되면 부산에도 터미널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신정기화물이 인천에 건설한 대신택배터미널. 사진=대신정기화물 제공.
대신정기화물이 인천에 건설한 대신택배터미널. 사진=대신정기화물 제공.

 

쌀 배달로 시작해 업계 최고로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오 회장은 여전히 현역이다. 매일 아침 회의를 주재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한다. 인터뷰를 하던 날에도 회사 로고가 새겨진 푸른 작업복 차림으로 취재진을 맞은 오 회장은 업계 최고로 성장하기까지 과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버님 때 가진 게 많았다. 그래서 많이 퍼주기도 했고, 소위 뜯기기도 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정작 사업을 위해 돈이 필요할 때는 돈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운영비 구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70년대 후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이후로도 한참동안 자금난을 겪었다. 50년 누적 적자를 버티고 지금의 회사가 됐다”고 회고했다.

이제 지역 제계 원로가 된 오 회장에게 지역사회는 ‘하고싶은 일은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그의 인생을 되짚어보면 스스로에게 엄격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의 선택에서 모든 판단의 기준은 ‘회사’로 귀결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회사를 운영하면서부터 여가생활은 끊다시피 했다. 그는 “밤 새워 일하던 시기다. 당시로서는 친구를 만나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사치였다”고 말했다. 2009년 의지했던 선친이 작고한 후로는 술도 끊었다. 혹시 일에 지장을 줄까봐서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검소함도 습관이 됐다. 일하기 편해서 유니폼만 입고, 운동은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 회장은 강한 추진력으로 회자되지만 회사에 관해서라면 섬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로고에 담긴 색도 그냥 정한 게 아니다. 녹색·빨강·노랑 3색으로 구성된 로고는 고객의 건강을  기원하고, 기업의 안정과 직원의 열정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본사 꽃담장도 노란 장미와 붉은 장미로 가득하다. 로고의 3색을 구현해놓은 것이다. “여기(본사) 터가 억세다. 기운을 바꾸기 위해 동쪽으로 문을 냈다”는 그의 말에서 회사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대신정기화물 본사 작업 현장. 사진=박상철 기자.
대신정기화물 본사 작업 현장. 사진=박상철 기자.

 

“남을 위해 일한다”
자신에게는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 오 회장이지만 아끼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회사(직원)와 사회다. 충북대에 정기적으로 장학금·발전기금을 기부하는 것을 비롯해 지역 기부단체 등에 꾸준히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오 회장은 “회사 이익금의 10%는 지역사회를 위해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경영철학을 설명했다. 오 회장은 “크게는 사회와 고객이고, 작게는 직원을 의미한다”며 “직원들이 평안해야 사업이 안정적으로 간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하면 회사나 나 개인에게도 득이 된다”고 말했다.

63년 업력의 대신정기화물자동차는 요즘 세대에겐 대신택배로 더 익숙하다. 정기화물이 주력이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택배가 차지할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 도입된 택배는 해마다 성장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국내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가 급격히 위축된 1분기에도 비대면 산업의 연결고리인 택배시장만큼은 오히려 성장했다.

미리 예견이라도 한 걸까? 코로나19로 인해 늘어난 물량으로 배송 지연 등 고민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수도권 물량의 빠른 처리를 위해 건설한 인천터미널 덕분에 고객의 신뢰는 더욱 커졌다. 오 회장은 “세상 모든 일이 때에 따라 변한다. 현재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 지 고민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비결을 설명하기도 했다.

오 회장은 다른 사업적 유혹에도 한 길만 걸어온 비결에 대해 그는 “아무리 좋다는 사업도 어렵긴 매한가지다. 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러니 이 일만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지역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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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욱 2023-06-30 16:51:30
고객센터 전화나 받으세요

김상중 2022-06-22 13:40:39
배송조회 가능하게 홈페이지 오류 좀 해결해주세요.

박종호 2020-06-03 17:07:49
작년 2월 하노이 북미회담을 응원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하노이에 간 적이 있다. 하노이 체류 10일 동안의 숙박 문제를 오흥배 회장님이 해결해주셨다. 잊지 못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