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유월, 새로운 꽃 피었다”
“되살아나는 유월, 새로운 꽃 피었다”
  • 유호찬
  • 승인 2020.06.0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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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6월 항쟁 in 청주’
마을N청소년과 함께 청주인권연대 ‘숨’ 평화기행
사진=유호찬
평화기행 참석자들의 기념사진 / 사진=유호찬

지난 7일, ‘87년 6월 민주화 운동’ 33주년을 맞아 항쟁의 역사와 가치를 기억하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기행이 청주에서 열렸다. 작년에 이어 진행된 이날 행사는 청주인권연대 ‘숨’의 평화기행 중 하나로 인권과 민주의 열망으로 치열했던 6월 항쟁 당시의 청주 곳곳을 답사하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이날 답사에는 당시 민주화 운동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시민과 ‘마을N청소년’ 회원이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특히, 87년 당시 충북대학교 부총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을 주도했던 이광희(전 충청북도의원)씨의 생생한 해설과 당시 청주대학교 2학년 이은규(인권연대 ‘숨’ 활동가)씨의 부연으로 참가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청주제일교회서 설명을 듣는 참석자들 / 사진=유호찬
청주제일교회서 설명을 듣는 참석자들 / 사진=유호찬

평화기행은 ‘소머리 투쟁’이라 불리던 농민운동의 집결지, 청주육거리시장에서 시작됐다. 다음은 현대사의 질곡마다 충북 민주화 운동의 요람 역할을 한 청주제일교회로 이어갔다.

제일교회는 일제 강점기(1923년)에 망선루(望仙樓, 조선시대 과거시험장)를 옮겨 세워 민족교육을 시행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식민화 교육을 반대했던 ‘교육의 도시, 청주’의 증거이다.

남궁병원 표석 / 사진=유호찬
남궁병원 표석 / 사진=유호찬

이후 항의의 주대상인  ‘작은 청와대’ 충북도청으로 가기 위해서 집결했던 남궁병원, 시민광장의 역할을 했던 성안길 국민은행(지금은 사라짐)과 중앙공원 그리고 전경과 백골단을 피해 숨어들었던 성안길 작은 골목으로 답사는 이어졌고, 도청에서 마무리됐다.

이번 평화기행을 기획한 정미진 일꾼(‘숨’ 활동가)은 답사 시작에 앞서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청주 곳곳이 당시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열망이 가득했던 곳임을 꾸준하게 기억하려 한다”며 “우리 시민들이 자긍심을 느끼고,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의 주체가 ‘나 자신’임을 느끼고 공감하길 바란다”고 행사 취지를 전했다.

중앙공원은 찾은 참석자들 / 사진=유호찬
중앙공원은 찾은 참석자들 / 사진=유호찬

행사에 참가한 새내기 대학생 송민재(충북대학교 경영학과)군은 “5.18=광주, 6.10=서울. 이런 식으로 역사의 중심을 배우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답사를 통해 내가 자란 청주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됐다”며 “또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역사 유적과 ‘5.16혁명 기념비’처럼 바로 세워야 할 역사도 알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한 참가자도 “무심코 지나치던 장소와 표식들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우리 지역의 역사 이해와 문화유산을 되살릴 고민 등 6월 항쟁에 대한 의미뿐 아니라 다양한 내용과 흥미로운 설명에 즐겁고 의미를 얻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오는 6월 10일 오후 6시. 청주 소나무길 입구(북문로)에서 충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가 주관하는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 및 거리문화제’가 개최된다.

6월 항쟁 / 사진=이재훈 작가
6월 항쟁 / 사진=이재훈 작가

 

들불처럼 번진 항쟁의 역사

'1987년 청주'

▲ 1987년 6월 18일
6월 10일 첫 집결 장소였던 청주제일교회가 원천 봉쇄되자 학생들은 중앙공원으로 옮겨갔고,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회자됐던 이화여대 <고추-가위> 소포 배달로 자극된 충북대, 시험 기간 중 소수 학생들의 교내 행진과 최루탄 추방대회. 그러다 하나 둘 불어난 대열은 충북대에서, 청주대에서 ‘택(attack)’과 동시에 시내를 향해 물밀 듯 채워졌다.

(좌) 6월 항쟁, 성안길 (우)충북대집회 노래패 맥놀이 / 사진=이재훈 작가
(좌) 6월 항쟁, 성안길 (우)충북대집회 노래패 맥놀이 / 사진=이재훈 작가

▲ 1987년 6월 19일
충북대생 200여 명으로 시위가 시작됨. 진압하던 경찰차에 깔려 아이가 다쳐 사망하는 참사와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은 남궁병원에 집결했다. 시위대의 수는 1만 명이 넘는 규모로 크게 불어났다. 이 기세를 타고 시위대는 청주시청, 민정당 충북당사, 사직경찰서, KBS 청주총국, 충청일보사 등에 화염병 및 투석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청주시 인구가 약 40만 명임을 감안하면, 인구의 2.5%가 시위에 나선 것이다.

▲ 1987년 6월 20일
전날에 이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KBS 차량을 불태우고 석교파출소를 함락(?)시키고, 영운파출소를 전소시켰다.
21일에도 시위대는 3일 연속으로 시내로 진출했고, 19일 공격한 KBS 및 충청일보사를 다시 공격했다. 이후 전경들에 밀려 퇴각하는 와중에도 시위대는 사창파출소를 공격해 불태웠다.

사진=유호찬
해설자로 나선 이광희 전 충북도의원 / 사진=유호찬

 

<인터뷰>

1987 청주의 생생한 기억

▲ 해설자 이광희(전 충북도의원)
Q. 당시 부총학생회장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당시의 열기(분위기)는 어땠나?
A. 87년 5월 당시,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이 압승하면서 이미 충북대는 민주화를 위한 술렁임과 학생들의 민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의 학생운동권이나 총학생회가 주도를 했다기보다,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 의지와 시민들의 엄청난 동참 의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간 학생들과 성안길을 꽉 메운 시민들의 열기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Q. ‘청주제일교회~중앙공원~옛 남궁병원 사거리~충북도청~상당공원’으로 이어지는 현장은 당시에 어떤 존재, 의미였는가?
A. 지방자치제가 운영되지 않았던 당시의 도청은 지방의 작은 청와대이자 정부였다. 당연히 시위대는 도청으로 몰려가곤 했다. 도청과 가까운 곳에서 집회를 하기 위해 모이던 청주제일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집결지였고, 이곳이 막히면 당연히 중앙공원에서 성안길, 국민은행을 거쳐 옛 남궁병원 사거리로 옮겼다. 성안길 입구인 수아사와 상당공원 역시 주된 집회 장소였다. 상당공원에서 청주대교 쪽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던 집회 인파와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을 잊을 수 없다.

6월 항쟁, 충북대집회 우리마당 / 사진=이재훈 작가
6월 항쟁, 충북대집회 우리마당 / 사진=이재훈 작가

▲ 참가자 배상철(87년 당시 충북대 무역학과 신입생)
Q. 입학 당시 학내 분위기와 본인의 느낌(생각)은 어떠했는가?
A. 집회와 최루탄으로 학교는 어수선하고 험악한 분위기였다. 나름 공부를 다짐하고 진학한 신입생 입장에서는 왜들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까지 받은 일종의 세뇌,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컸다.

Q. 6월 항쟁 당시 시위 참여 경험이나 기억은?
A. 1학년 때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강에 있는 집에 가는 버스가 오지 않고, 매운 최루탄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남궁병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어린 아이가 경찰차에 치였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시위에 참가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보며 그 동안 내재했던 관념에 대한 의문과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6월 항쟁, 6.29 선언 등이 지났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와 학생운동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고, 참여를 했다.

Q.당시의 경험이 현재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A. 87년 겨울, 무심천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대통령 선거 유세(제13대 선거, 12월 16일)를 했다. 6월 항쟁의 경험 후 유세장에 자발적으로 가서 그들의 주장을 듣기도 하고,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학습(?)을 했다. 그렇게 싹튼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인식은 삶의 잣대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지금하고 있는 청소년 권리찾기 운동이나 두꺼비마을 공동체 참여 같은 것이 6월, 그날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류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최류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턱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진실은 쓰러지지 않았다

- 87년 1월 13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 박종철.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 이튿날 14일 사망.

- 전두환 정권과 하수인들, “턱~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궤변으로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 함.

- 교도소 수감 중에 사건의 정황을 알아 챈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부영(현,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과 한재동 교도관, 함세웅 신부 등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사건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남.

- 1987년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 미사가 열리던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가 사제단 명의로 성명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진상이 빛을 보는 역사의 순간이 됨. 이를 도화선으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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