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 이야기 10]-진천 배티성지
[로컬 큐레이터 변광섭의 마을 이야기 10]-진천 배티성지
  • 변광섭
  • 승인 2021.02.2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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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땅 배티, 자연과 함께하는 마음수련

배티성지 내 성당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남쪽지방에는 매화가 활짝 피었다는 소식이다. 무심천의 버들강아지도 소식을 전해왔다. 산과 들이 해동을 하니 마늘밭 보리밭이 푸릇푸릇해질 것이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할미꽃이 고개를 내밀고 생강나무꽃도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다. 이른 아침에 숲속을 오르는데 발 닿는 곳마다 흙살의 싱그러운 기운이 발끝을 타고 가슴으로 올라오니 대지의 온갖 생명이 태기를 하고 입덧을 한다.

봄은 이렇게 온기를 실어 나른다. 희망을 준다. 상실감에 젖어 있는 나그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준다.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일 때 꽃길을 걷고 봄볕 가득한 들녘을 바라보게 한다. 두런두런 봄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고 봄의 무덤에서 한유롭게 놀다 가기를 권한다. 마른 가지에 새 순이 돋아나더니 여기 저기서 꽃들이 무진장 핀다. 퐁퐁퐁…. 대지가 트림을 하고 꽃들이 기지개를 펴는 소리가 들리는가. 부드럽고 따듯한 봄날의 아지랑이가 보이는가. 

봄은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아무리 어깃장을 놓아도 입춘이 지나면 남녘에서부터 하루에 15㎞씩 북상한다. 오직 사람의 마음만 부산스럽다. 내 마음은 아직 꽃대를 올릴 채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봄볕을 걷다가, 꽃망울을 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얘들아, 나 어쩌란 말이냐. 나는 너를 위해 해준 것도 없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미안한 마음으로 봄을 맞이한다.

배티성지 산상제대<br>
배티성지 산상제대

몇 해 전, 세상사는 게 고되고 힘들어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할 때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변 선생, 신앙생활 하시나? 우리 성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하며 새 생명을 꿈꾸면 어떨까? 내가 대부(代父) 역할 잘 할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리하겠노라 했고 6개월간의 교리공부 끝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그날 이후 주일마다 미사 보는 두 시간은 설렘과 긴장과 여백의 미로 가득하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고, 여럿이 함께 해서 좋고, 묵상하며 삶의 군살을 걷어낼 수 있어 좋다. 때로는 마음 부려놓고 무념무상의 호젓함도 내겐 새 살 돋는 시간이다.

대자연을 통해 야위어진 삶을 어루만지는 것도 좋지만 아픈 마음을 도닥거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피정체험을 한다. 불가의 템플스테이와 같은데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약자로 리트릿(Retreat)이라고 한다. 일상을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 성찰, 기도 등의 수련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신앙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행위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북부의 어촌 갈릴리에서 예수는 온종일 쫓아다니는 군중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다. 예수의 제자도, 중세의 성인도 산중기도를 했다. 그 전통이 2000년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소울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치유와 힐링과 묵상을 통해 모든 욕망을 부려놓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배티성지 십자가의 길

성당에서의 묵상도 피정이지만 성지체험은 내 마음에 평온이 깃들게 한다. 진천군 백곡면에 위치한 배티마을.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으로 이곳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불린 이름이다. 소나무 숲에 잘 가꾸어진 순례자의 길이 호젓하고 아스라하다. 이곳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땅이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다. 1853년 여름부터 3년 동안 배티마을 교우촌을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미사를 집전하고,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글을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한글 「천주가사」를 지어 널리 전파했다.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도 번역했다.

천주교에서는 배티마을에 순교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성지를 조성했다. 대성당과 최양업신부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초가집의 옛 모습 그대로 재현했다. 순교 복자 오반지(바오로) 묘를 비롯해 무명 순교자 20여 명의 묘가 있다. 순교자들이 박해를 받고 교수형에 처했을 때 사용했던 형구돌이 그날의 상처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배티성지의 백미는 산상제대다. 드넓은 소나무 숲속에서 미사를 보며 기도하는 곳이다. 이곳으로 가려면 십자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시간을 기억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곳이다. 내 마음의 눈을 뜨게 하고 눈물로 감사함을 묵상하는 치유의 숲이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몸과 마음이 기진했을 때 일상에서 벗어나 기도하며 쉬는 것만으로도 힐링이고 구원이다. 두 손을 모아보자. 마음의 평화가 오고 아픔이 아물고 있지 않은가.  <사진 김영창>

 


변광섭 청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로컬큐레이터, 에세이스트. 저서 『즐거운 소풍길』,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 『이 생명 다하도록』, 『불꽃의 시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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